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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조선시대의 백자 달항아리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조선시대의 백자 달항아리

K-Classic News 석경 황규완 | 보름달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우면서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둥근 항아리를 우리는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높이 40센티미터 이상 되는 큰 항아리를 이른 바 백자대호白磁大壺라고 해서 더욱 귀하게 여긴다.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18세기 중엽인 영조 시대에 들어 1721년부터 1752년 사이 조선왕조 관영 자기소가 운영되던 경기도 광주廣州 금사리金沙里 가마에서 처음 선을 보였고 1752년 이후에는 광주 분원 가마에서도 초기에 일부 제작되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본래 백자 달항아리는 전통 물레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릇 모양을 빚어 올릴 때 아랫부분이 굳지도 않은 상태에서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면 태토가 주저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양의 항아리들은 대개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가 홀쭉한 이른바 장호長壺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보름달처럼 넉넉한 느낌의 둥근 항아리를 만들고 싶은 조선 도공들은 이 기술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달항아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기술의 비법이란 커다란 왕 대접 두 개를 만들어 그것을 위아래로 이어 붙여 항아리를 만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런 연유로 모든 달항아리는 가운데 부분에 이어붙인 자국이 있고 전체적인 형태는 아주 동그란 것이 아니라 둥그스레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점 때문에 달항아리는 인간적인 채취가 살아있는 너그러운 형태와 어질고 친숙한 선 맛을 지닌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훗날 예술가와 문인들이 수없이 칭송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최순우 선생이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한 구절을 들 수 있다. 본래 달항아리의 용도는 당시 궁중에서 감상용이나 의뢰용으로 꽃을 곶아 사용된 것으로 추축되며 현존하는 달항아리는 250여 년을 견디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수량은 국내외를 통 털어 약 30점 정도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석경고미술연구소

K 오페라 이탈리아와 상호 교류를 시작으로 유럽 진출 가능성 열어야 할 때

오페라극장 시스템 부재한 한국의 실정, 개인 매니저 역할 필요

K 오페라 이탈리아와 상호 교류를 시작으로 유럽 진출 가능성 열어야 할 때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상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야 한다 오페라를 통한 외국과의 교류는 단순한 문화 교환을 넘어, 한국 오페라의 브랜드화와 세계화를 위한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특히 이탈리아 국립극장들과 연계하여 우리 오페라를 소개하고, 동시에 이탈리아의 대표작들을 국내에 유치하는 상호 교환 프로그램은 매우 실현 가능성이 높고 전략적 가치가 크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경우, 자국 중심주의가 강한 경향이 있지만, 예술적 수준이 높고 스토리가 분명한 한국 오페라를 제안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면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순환 구조를 통해 양국 간의 오페라 교류는 더욱 긴밀해질 수 있다. 한편, 오페라의 번역 문제는 여전히 고민의 대상이다. 한국의 주요 레퍼토리들을 한국어로 공연할 것인지, 현지 언어로 번역할 것인지에 따라 감동의 밀도와 전달력에 차이가 발생한다. 독일에서도 과거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국어로 번역해 공연했던 사례가 있었으며, 이는 언어가 음악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어 오페라 역시 장기적으로는 자막과 해설을 병행하거나, 우리 말의 미학을 유지한 채 해외에 소개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미 한글의 세계적 확산 흐름을 고려할 때, 한국어 원어 공연이 곧 새로운 문화적 차별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한국 오페라 진출 성과를 역수입하는 방식도 고려 한국 오페라의 세계 진출은 단순히 공연을 해외에 올리는 것을 넘어, 스토리와 역사적 배경을 함께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컨대, 어느 이탈리아 음악 시험에서 한 학생이 한국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불렀다는 일화처럼, 한국의 역사와 정서에 공감하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 오페라는 신선한 감동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해외 무대에서 성공하려면, 작품 선정부터 유튜브 홍보, 예산 산출, 스폰서 유치 등 다양한 요소를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하며, 현지에서 성과를 내야 국내 오페라 산업도 생존할 수 있다. 침체에 빠진 한국 오페라 현실에서는 해외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역수입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러한 세계 진출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는 ‘K-오페라 페스티벌’의 개최가 있다. 이는 한국 오페라만을 위한 전용 브랜드 페스티벌로, 특히 우리의 지방 중극장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열리는 구조가 현실적이다. 각 도시를 순회하면서 지자체들의 참여로 3~5억 원 지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 여기에 연출가, 제작진, 무대 디자이너의 협업을 통해 공연의 질을 높이고 책임감을 부여하는 구조를 만들면 더욱 지속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대사관 및 해외 기관과의 연계는 후원사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된다. 고급 상품화를 위한 해외 진출 기업들의 오페라 마인드 조성이 관건 특히 후원금 확보는 오페라 산업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의 ESG 경영과 연계해 문화 후원의 명분을 강화하고, 팬덤 기반의 크라우드펀딩이나 NFT 티켓을 통한 신세대 참여 방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국가지원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90점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공연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마인드 변화만 있다면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 판소리 등 한국 전통에 각광하는 이탈리아 이제 K-오페라 브랜드는 시작 단계이다. 세계적인 콘텐츠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예술성과 언어의 경계를 넘는 감동, 그리고 문화적 전략이 동시에 요구된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전통음악의 감동을 기반으로, 한국 오페라가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며, 이를 위한 민간·정부·기업의 삼자 협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7월 8일 오전 10시, 청담동 아트 전시장에서 만난 밀라노의 성악가 다비데 길 (Davide Kil)과 이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IA by IA), 탁계석 K-OPERA 회장

[K-Classic 캠페인] K클래식이 펼치는 '나눔 가곡 티켓 운동' (2)

자기 중심(中心)에서 이타(利他)의 삶으로 원숙해지는 노래 인생을

[K-Classic 캠페인] K클래식이 펼치는 '나눔 가곡 티켓 운동' (2)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우리 말 우리 정서, 가곡이 K 클래식 문화의 정수 새로운 가곡 하나를 외운다는 건, 단지 멜로디를 익히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곡의 난이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백 번, 때로는 수천 번을 불러야 비로소 노래가 ‘내 것’이 됩니다. 그렇게 수없이 부르며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음표들이 어느 순간 가슴에 강물처럼 흘러드는 거죠. 그 강물은 내 마음의 노래가 되고, 나의 인생이 됩니다. 길을 걸을 때도, 문득 멈춰 섰을 때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선율이 맴돌며 나를 감쌉니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온몸이 젖고, 가사의 이미지가 상상력을 타고 움직이며, 내 내면의 풍경을 넓혀갑니다. 그렇게 노래는 힘들때나 기쁠때나 삶을 견디는 윤활유이자, 세상을 딲아주는 창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것을 내가 부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노래를 누군가 들어주고 함께 공감해준다는 것,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중심이긴 하지만, 아주 조금만 시선을 바꾸어 주변을 바라본다면, 내가 가진 이 감동과 노래를 타인에게 전하는 삶이 훨씬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멋진 가곡 콘서트에 소중한 티켓을 함께 나누고, 함께 감상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을 통한 따뜻한 연대이자 진정한 문화의 확산입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 말자’는 생각이, ‘함께 나누는 인생’으로 전환되는 순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작지만 확실한 울림이 될 것입니다. 음악회의 초대는 누군가의 삶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수도 그래서 좋은 음악회의 초대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누군가의 삶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심코 흥얼거리는 콧노래 하나에도 작은 행복이 깃들 듯,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은 인생이라는 화원에서 내 스스로 꽃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K-Classic 나눔 가곡 운동이 지향하는 바이며, 우리의 노래가 세상과 다시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받아 본 사람만이 주는 여유와 기쁨을 압니다. 그것이 어찌 사랑만 일까요? 우리의 노래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티켓 선물'이 밥 한끼의 식사 대접 보다 낫다는 것을 노래부르는 사람부터 실천에 옮기려 합니다. K-Classic 이 K-Pop, BTS의 넥스트 버전이니까,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성악 강국 대한민국이, 우리 K 가곡이,바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이 혼란스런 세태에 가곡이 살아야 문화가 살고 품격이 살고 우리의 멋진 인생이 살아 납니다.

나의 삶, 나의 음악 (My life, My Music)

나의 삶, 나의 음악 (My life, My Music)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삶, 나의 음악 (My life, My Music) 나는 1939년 10월 30일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출신 의학박사이신 아버지(張慶 박사)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피아니스트를 꿈꾸셨던 어머니 김태임(金泰任) 여사 사이의 4님 1녀의 외동딸로서 서울시 종로구 도렴동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 한옥의 대청마루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피아노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99간 집을 가진 개성 최고 갑부의 딸이섰던 어머 나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딸을 낳으면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리라는 소망 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그 당시 경성제대 의학전공이시면서도 '경성제대 오케스트라'(우리나라 최초의 서 양음악오케스트라)의 수석 Cellist이셨고 지휘까지 하셨으며, 오빠와 남동생도 각자의 전공분 야에서 성공해 있지만 아마추어로서 전문가 못지않게 Cello를 연주한다. 우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저녁이면 아버지께서 연주하시는 Kol Nidrei, G.F.Handel의 Lar-go, F.Schubert의 Serenade, 자장가, 들장미, Saint-Saens의 백조 등의 Cello 소리와 죽음기 (옛 유성기 SP)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매우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특 히, 나는 가끔 부모님께서 번갈아 가며 동화처럼 읽어주시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 음악가들의 이 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당시 부모님께서 오선지에 직접 손으로 사보해 놓으신 누렇게 바랜 명곡 Cello 악보들을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 당시 의학계의 김승현 박사님, 전 보건사회부 장관 김성진 박사님 그리고 음 약계의 현제명, 이영세 선생님, 이흥렬 교수님 등과도 친분이 두터우셨다. 해방되기 전 5세에 어머니와 당시 일본유학을 다녀오신 최정선 선생님께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수송국민학교(현 종로구청 자리)에 입학한 후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독일 유학생 이셨던 이애내 선생님을 사사했다. 학교에서는 피아노 치는 아이로 알려지면서 수송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학예회와 종로구 정동에 위치했던 배제학당 강당, 그리고 역시 정동에 있었던 KBS 방송국에 자주 출연했다. 초등 학교 4학년 때 이애내 선생님께서 등이 굽는 카리에스 병환을 앓으셨기 때문에 장기간 침대에 누 워서 레슨하셨는데 부군이셨던 우리나라 제1세대 Violinist 안병소 선생님께서 늘 콧노래를 부 르시며 열정적으로 음악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여러 번 문교부 주최 콩쿠르에 나가 입상할 기 회를 주셨고, 무대 경험을 쌓게 해 주시곤 했다. 또한, 몸의 무게를 이용한 코드 연습과 여러 가지 의 페달 테크닉 그리고 스케일 테스트를 하신 후 레슨을 시작하시곤 했다. 몇 달간 병원에 입원하 셨을 때에는 선생님의 제자이셨던 정진우 선생님께 사사 받도록 해 주셨는데, 마침 정진우 선생 님은 나의 아버지께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서 내과 과장으로 재직 시 아버지의 레지던트 제자이시기도 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나서 마산을 거쳐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전쟁 와 중에도 어머니는 방문에 바르는 커다란 창호지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셔서 방바닥이나 밥상 위에 올려놓고 스케일 연습을 시키셨다. 마침 이애내 선생님께서도 대구로 피난을 오셨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선생님께 사사 받을 수 있었다.(1999년에 어머니는 문화관광부에서 제정한 '장한 어 머니상'을 수상하셨다.) 피난 초기에는 많은 한센병(문둥병) 환자들이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촌을 이루고 살았던 방천 뚝을 건너 언덕 위 폐농가의 초가 그늘막에서 배웠고, 그 후 시내로 옮겨온 대구피난중부국민학 교를 졸업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다함께 노래를 부르게 하셨으므로 일선에서는 한창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합창 소리가 그치질 않았 다. 그 후 곧바로 대구피난연합중학교에 다녔으며 전쟁이 한창이어서 매우 불안하고 암울한 시기 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가 주최한 학예회에 출연하여 대구 예술극장에서 피아노 독주를 하 였다. 어떻게 그러한 와중에도 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그만큼 음악 예술을 사랑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위로 그리고 위안을 갖기 위함이 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들은 자주 제일육군병원으로 위문공연을 다녔는데 계속 부상 병이 실려 오고 콩나물 소금국에 식사하던 장병들의 모습이 선하다. 피난 생활 3년 후 중학교 2학년 말에 서울로 와서 숙명여중고를 다녔는데 당시 문남식 교장님 께서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과 체육에 대한 교육열과 사랑이 넘치셨던 훌륭한 지도자이셨으며, 숙명에서는 수많은 문인, 음악인, 화가, 조각가, 체육인들을 양성해 내었다. 숙명의 전성기라고 도할 수 있었던 그 시기에는 음악 지도에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이며 전 중앙대학교 음대 학장 정재동 교수님과 전 한양대학교 음대 작곡과 장일남 교수님, 그리고 미술 지도에는 대한민 국예술원 회장 이준 선생님과 임직순, 이종무 선생님 등의 기라성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 술인들이 계셨다. 아침마다 강당에서 전교생이 부르는 애국가와 교가의 피아노 반주를 도맡아 했으며 정기 예술 제에서 피아노 독주와 배제학당 등에서 연주를 했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명 동 국립극장에서 김생려 선생님의 지휘로 소년소녀 협주곡의 밤에 출연하여 L.v. Beethoven의 Piano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그때 청소년 협주곡의 밤에는 어린 백건우가 Grieg 콘체르토를 협 연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전 이화여대 음대 학장이셨던 신재덕 선생님께 사사 받았으며, 이화여대 주최콩쿠르에 입상하여 특기생 자격을 얻었다. 그 후 이화여대 음대에 실기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는 문교부 주최 성인음악콩쿠르에서 피아노부 수석 입상하였으며, 이화여대 대강당에 시한 면세대학교 음대 학참이셨던 정희석 교수님의 지휘로 국립교향악단과 F.Mendelssohn Piano 협주곡을, 그리고 임원식 선생님의 지휘로 W. A. Mozart의 협주곡을, KBS 교향악단과는 L.v. Beethoven Piano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신재덕 선생님께서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해마다 Emer-son Hall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갖도록 해주셨는데, 그때 이미 C. Debussy와 B. Bartok은 물론 P. Hindemith, A. Schönberg, L. Dallapiccola, A. Copland 등의 현대 피아노 작품을 한두 곡 씩 레퍼토리에 넣어 연주하도록 해주셨다. 이화여대 음대에서 실기 수석으로 졸업하여 조선일보 사 주최 신인음악회에 출연했을 때의 곡도 M. Balakirev의 Islamay였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내폭넓은 레퍼토리를 접하게 해주셨고 특히 음악성을 강조하셨으며, 음악적인 감흥을 넣어주선다. 그러한 영향으로 나는 줄곧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 같다. 이화여대 재학 중에 전교생 중에서 단 2명에게만 수여하는 김활란 총장님의 전액 장학생에 선 발되었던 것이 나에게는 이화여대 재학 중의 가장 큰 영광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선후배, 친구를과 늘 실내악과 피아노 반주를 많이 하면서 우정을 쌓고 앙상블 생활을 했었다. 독일 유학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문교부 주최 독일 유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연달아 독일 대사관과 제기획부, 문교부가 공동 주최한 독일 정부 국비장학생(DAAD) 시험에 합격하여 1964년에 꿈 그리던 음악의 나라 독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맨 처음 독일 남부 Staffel이라는 호숫가에 치한 Murnau 마을의 Goethe Institute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 그 몇 달간 나는 이 작은 미 의 대부분 농부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반주와 더불어 음악회에서 피아노 독주를 하였으며 신문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했다. 저녁이면 이웃들이 모여 주막이나 음 점에서 맥주와 함께 순대와 Sauerkraut(독일 김치)를 먹으며 항상 즐겁게 지내고, 농한기다말쑥한 정장차림을 한 채 BMW와 Benz를 타고 근처 Muenchen Opera House에 다녀오금는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왜냐하면 1960년대 초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절이었고 특히 우리나라의 농부야말로 가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화만큼이나 문화 향유의 평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 자신이 뼈저리게 느꼈다.그리고 Frankfurt국립음대 입학시험을 앞두고 각 시대별 작품들을 연습해야 했으므로 저다 어두운 숲속의 작은 교회로 가서 피아노를 연습하고 깊은 밤이 되면 하숙집으로 돌아올 는 항상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경제협정을 위해 독일 방문을 하셨는데,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께 서 유럽에 유학 중이던 음악인들을 모아 '한국인의 밤' 축하음악회를 뮌헨의 연주홀에서 개최하 섰다. 그때 처음으로 윤이상 선생님을 만나 뵈었고, 윤이상 선생님의 Piano Trio 작품을 Violin-ist 김창환(전 숙명여대 교수), Cellist 현민자(전 연세대 교수) 선생님과 함께 윤이상 선생님께서 직접 손으로 사보하신 악보로 초연하였다. 이 악보는 그때까지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Frankfurt 국립음대 재학 중이던 유학 초기에 동백림 사건이 발생하여 윤이상 선생님께서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셨으며, 훗날 독일 Muenchen Opera House에서 선생님의 오페라 '심 청전'이 세계 초연되었을 때 나도 영광스럽게 초대받았고 10여 분에 걸친 커튼콜과 기립박수가 대단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마침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님께서도 대통령 방문단과 함께 독일로 오셨으며 한국일보사 사장이셨던 장기영 경제부 총리님과 Benz세단에 동승해 초청받으시는 곳마다 나도 동 석할 수 있었다. 내가 김활란 총장 장학생이었던 당시, 김옥길 총장님께서는 학생처장이셨으며 충장 공관과 새 집에서 메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님을 비롯한 외교관과 후원자 초청만찬 때마다 나를 부르셔서 피아노 연주를 시키셨을 때 김옥길 총장님께서도 늘 그 자리에 함께 계셨으며, 나 를 사랑해주셨다.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 입학시험에서 Diplom Course를 넘어 곧바로 독일 음대 최고연주자 학위인 Konzert-Examen 과정에 합격했다. 독일에서의 스승은 August Leopolder 교수님이 셨는데, 이분은 Ferruccio Busoni의 제자요, 당대 유명한 Pianist셨던 Egon Petri의 제자이셨 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셨고, 스승과 테크닉, 음악적 해석, 음향학적 견해 등에 대해 주고받 으신 장문의 편지를 가끔 읽어주곤 하셨다. 선생님은 지나친 연습을 싫어하셨고 다방면의 광범위한 책을 읽을 것과 가능하면 자연과 가깝 게 지내기를 권하셨으나 나는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음대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제일 먼저 좋은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을 차지해서 맹연습을 했기 때문에 늘 걱정해주셨다. 당시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었므로 DAAD 본부에서는 해당국 장학생을 위해 왕복 여비는 물론이요, 학기 초마다 책값과 겨울에는 오바코트 보조금까지 지불하는 등, 참으로 국비장학생 들에 대한 배려가 많았다.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음대 학생증만 제시하면 매일 저녁 아주 저렴한 입석을 사서 언제든지 Opera 공연과 음악회를 갈 수 있었고 학생 우대 행사가 많아 당시는 학생 천국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1960년대 초당시에는 유학생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그 시절 나는 당대의 저명한 음악가 Wilhelm Bachaus, Claudio Arrau, Schwarzkopf, A. Brendel, 청년이었던 Eschenbach 등의 수많은 연주와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회가끝나면 학생들끼리 주막에 모여 열띤 토론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때로는 음악에 대한 의견 이 맞지 않아 기분 상하기도 하고, 말다툼도 적지 않았다. Leopolder 교수님과 역시 피아니스트이신 사모님께서는 자주 나를 댁으로 식사 초대하시는 older 교수님께서는 친구이셨던 저명한 작곡가 Hessenberg와 Mohler 교수. 옛 제자 Volk-등, 각별히 아껴주셨으며 방학이면 학기 중과 똑같이 열성을 다해 무료로 레슨해 주셨다. Leop-man과 Shott 등의 음대 교수들을 나의 연주 때마다 초청하여 주시는 등 열성을 다하셨다. 선생 님의 TV에서의 공개 레슨에서는 나를 모델로 출연시키셨고, 국영방송에서의 방송 스케줄이 일 간신문에 실리면 나의 이름과 연주곡이 나온 부분을 오려서 주시곤 했는데, 내가 귀국한 후에도 한동안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특히 나는 헝가리에서 망명해오신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의 Bariton Bernat 성악 교수님의 전속 반주자가 되어 3년간 많은 독일 가곡을 접할 수 있었다. Bernat 교수님은 레슨 시간의 거의 절반은 시(가사)에 대한 해석과 문학의 이해에 할애하셨는데 성악가와 반주자는 시에 대한 해석 과 감흥이 선행되어야 함을 주장하셨다. (그것은 후에 이화여대 음대에서 실기 이외의 피아노 반 주법을 20여년 간 가르치고 많은 음악인들의 반주와 앙상블 연주를 하면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되 었음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Bernat 교수는 가끔 제자들과 학부모님들을 댁에 초청하여 간단한 쿠키와 치즈, 사과주를 준비하시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House Concert를 마련하셨으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갖게 하셨다. 마치 슈베르트 생존 당시, 음악으로 우정을 다지며 대화를 나누고 행 복한 시간을 가졌던 역사 속의 Schubertiade처럼...나는 Radio와 국영 TV방송(Hessische Rundfunk)에 여러 번 출연하였고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정기공연에서 W. A. Mozart Concerto를 협연하였으며 외국 학생들을 위한 ASTA Reise를 통해 독일 각 지방의 명소를 여행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F. Busoni 음악 제, 초청독주회, 실내악 연주, 각종 Solo 연주 등 나의 유학생활은 거의 전문연주가 생활과도 흡 사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교수 1968년 5월에 나는 독일에서 한국인 최초로 Konzert-Examen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9 월부터 이화여대 음대 피아노과 전임교수가 되었다. 10월엔 세종문화회관(당시 시민회관 대강 당)에서 동아일보사 주최로 귀국독주회를 가졌으며, 김영의 이사장님, 김옥길 총장님, 신재덕 학 장님을 비롯한 이화여대와 각 대학교 음대 교수님, 그리고 고 이영세, 유한철, 금수현, 이성삼, 유 신, 김정길, 이상만, 한상우 평론가님들과 음악계의 많은 인사들께서 자리를 빛내주셨다.1971년 11월에는 약혼 후 약 4년간 기다렸던 이상복(李) 박사(서울대 의대 신경과 명예 교수)와 결혼하였으며 1977년에는 외동딸 이호원(미대 교수)를 낳았고 나의 딸은 서명한의대 교수)와 결혼하여 다연, 예림의 두 딸을 두고 있다. 1970년대에는 주한 독일 문화원의 예술행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나도 남산에 있는 주상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e) 개관 기념 피아노 독주회를 갖는 등 많은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 리고 박민종(Vn), 김재홍(Vc), 김용윤(V1), 이종숙(Vn), 이봉수(Vn), 이한성(Ob), 운용석(Bas-son), 이재헌(Vn), 백윤창(Vn), 안용기(Va), 양재표(Vc), 이남수(지휘), 홍연색(지휘), 김민(Vn), 나덕성(Vc) 등의 교수들과 많은 실내악 연주를 하였으며, 김자경 선생님 독창회, 채리숙(Sop) 교 수와 김문자(건국대) 교수 귀국 독창회 그리고 황영금(Sop) 오현명 (Bar.) 박노경(Sop) 교수님 을 비롯한 많은 성악가들과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또한, 일본, 독일, 이태리, 미국 등에서 내한 공 연을 한 외국인 음악인들과도 자주 연주하였다. 세종문화회관 신축 재개관 기념 피아노 독주회를 하였고 동아일보사, 중앙일보사, TBC, 한국일보사, 서울신문사 등에서 초청한 Violinist 루지에로 리치, Christian Ferras, Aron Rosand, Andre Navara, Soparno Renata Tebaldi, Tenor Franco Corelli 등 세계적인 음악인들과 협연하였으며 여러 오케스트라 및 챔버앙상블과도 연주하였다. 또한, 작곡가 나운영, 이영자,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셨던 미국인 작곡가 James Wade 선생님의 피아노 협주곡을 초연하였으 며 임원식 선생님의 지휘로 국립교향악단과 M.Ravel의 피아노 협주곡도 한국 초연하였다. 그리고 Heidelberg Stadt philharmonic orchestra, Frankfurt musikhochshule or-chestra, Budapest chamber orchestra, 체코슬로바키아 Kosice chamber orchestra, Hongkong philharmonic orchestra, Taipei symphony orchestra, KBS 교향악단, 국립교 향악단, 서울시립, 부산시립, 수원시립, 대전시립교향악단 등의 여러 시립 오케스트라와 협연했 으며 Korean symphony orchestra, Seoul chamber, CBS, 여성 스트링, 이화여대 음대 오케 스트라, 이화스트링앙상블 등과도 협연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아시아, 프랑스, 미주, 유럽을 포 함한 여러 나라에서 순회 연주회, 독주, 실내악, 레코딩, 페스티벌 등의 연주 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또한, 전 서울대 음대학장 백낙호 교수, 청주대 김하경 교수, 한양대 권기택 교수를 비롯하여 전 계명대 음대 학장 임우상 교수, 전 목포대교수 김정수 작곡가,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서우석 교수 그리고 한국 음악계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오셨던 여러 지방 대학교 소속 작곡 및 이론 전문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한국음악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로 인해 나는 조직력과 행정 력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작곡가 금수현, 김동진, 정희갑, 이연국, 김동환, 유신, 윤해중, 이성재, 박찬석, 김정길, 평론가 유한철, 이성삼, 김형주 등 많은 분들로부터 끊임없는 가르침을 받았다. 음반·연주·국제콩쿠르 심사위원 한편 세계적인 공반회사 Naxos 소속 아티스트가 되어 1980년대부터 약 15년 간 일본, 독일, 홍콩, 미국, 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서 Naxos사 기획의 음반을 취입하였다. 단독 음반으로 일본의 저명한 Hiroshi Isaka 대표의 Camerata Tokyo사와 Telefunken사가 공동 기획한 일본 전음사(Zenon) 출판 교재 33개의 D.Scarlatti Sonatas를 연주 녹음(LP 3장을 세 트로 하여 교재와 함께 판매)한 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나의 긴 음반 연주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Violinist Nishizaki Takako와 Kreisler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집, 홍콩의 프 리마돈나 Ella Kiang의 Chinese Folk Songs, J. N. Hummel의 피아노 협주곡 a minor와 b minor. J.S.Bach의 7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1996년 Amazon의 '올해의 클래식' 음반으로 선정, 제5번 2악장은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툼레이더'의 OST로 삽입), J. Haydn의 피 아노 협주곡 전곡(제 4번 2악장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영화 'Catch me if you can'에 삽입), 그리고 Gabriel Pierne 피아노 곡집(프랑스 Compact지의 최고 평가 'Refer-ence' 받음), J.lbert 피아노곡 30 선곡, J.N.Hummel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Volume I, II, III 등 11장의 단독 CD와 수많은 옴니버스 CD가 출반되었다. 이렇게 음반들이 국제적으로 알려 지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러시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포르투갈, 스페인, 불가리아와 한국 일본을 비롯한 중국, 대만, 싱가폴, 말레이지아, 베트남, 홍콩, 인도네시아 등에서 개최된 국제피아노콩쿠르에 50여 회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해외 각국의 저명한 음악인들과 광범위한 국제 교류를 이룰 수 있었고, 그분들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피아노학회의 심포지엄, 이원뮤직페 스티발, 세미나, 총 29개국의 교수들과 청소년들이 참여한 Asia International Piano Acade-my & Festival with Competition 그리고 그동안 총 1,788명이 출연한 Grand Piano Con-cert 등의 많은 국제행사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이화여대 음대 학장·초대 음악연구소 소장 이화여대 음대 학장으로 재직 시에는 이화여대에 음악연구소를 최초로 개설하였고, 음대에 컴 퓨터실과 Digital Piano 실을 만들어 음대생들이 Group Piano 또는 Class Piano 등의 현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금호문화재단의 故 박성용 회장님은 음악, 미술 등의 문화예술에 대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셨던 분이셨다. 이로 인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과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는 우리나라음애게에서는 최초로 산학 협력을 맺어 성민과 교사를 위한 한국의 정서가 깃들어 있고 전통민요 ※대중음이, 영화음악 등을 작곡 편곡하여 삽입된 신토불이 피아노 교재 두 권을 발간하였다그리고 나를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이사와 예술의 전당 이사로 선임해주시면서 음악 발전을 위해 함께 김씨줄 것을 부탁하셨다. 어느 날 회장님은 나와 정혜자 전 금호문화재단 상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던 중 "Paris Festival 연주로 내가 프랑스를 방문하였을 때 파리 근교에 위치 한프랑스 작가 Emile Francois Zola가 실던 집의 마구간에서 리허설을 하였는데 옛날 마구간 음악홀과 갤러리로 겸해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당장 그 자리에서 경복 공업의 금호 갤러리에서 음악회를 시작하자는 말씀을 하시고는 곧바로 남산 3호터널 앞 금호 본 금호문화재단의 '금요 콘서트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금호영재 음악회', '금호영재 음악 사에 놓여 있던 Steinway & Sons Concert Grand Piano를 옮겨다가 첫 연주를 개최함으로써 상동을 만드셨고, 나는 8년간 '금호 영재 음악상'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원문화원(천안)·한국피아노학회 설립 예전부터 문화원을 만들려는 꿈을 안고 수원에서 몇 년간 전원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적인 Summer Camp를 무료로 가졌었으나 신갈-안산 고속도로가 건설 되면서 그 집이 헐리고 나의 꿈도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1988년 남편 고향인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호숫가 언덕 위의 농장에 이원문화원을 설립해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1991년부터는 곽은수 전 이화여대 음대학장, 정정식 교수 등을 모시고 한국피아노연구회를 창립하였고 몇 년 후에는 서울대 음대 학장이셨던 정회갑 교수님의 권유로 연구회를 학회로 명 칭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초대회장으로는 백낙호 전 서울대 음대학장, 제2대는 이성균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제3대 장혜원 전 이대 음대학장, 그 후로는 조삼진 전 건국대 음대학장, 최영자 세종대 음대 명예교수, 임옥빈 전 중앙대 음대학장, 이경숙 전 연세대 음대학장, 그리고 이 대욱 전 한양대 음대교수, 함영림 전 이대 음대학장, 김해영 추계예대 명예교수, 정완규 중앙대 명예교수와 이혜전 전 숙명여대 음대학장, 상명대 김희진 교수에 이어 현재 명지대 홍은경 교수가 회장으로 부임해 있다.) 1991년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 유학 자율화와 더불어 해외음악캠프 붐이 일어나서 방 학만 되면 교수 강사들이 수백 명의 학생들과 함께 해외캠프를 다녀오곤 했다. 그러나 나는 외화 도 절약할 겸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교수와 강사만을 위한 우리만의 독특한 전문음악 인을 위한 캠프를 열기로 하였다. 천안 이원문화원의 평화롭고 푸른 자연 속 사과 창고에서 우리 가만나 뵙기 어려운 외국의 저명 교수를 한 분씩 모셔다가 통역을 통해 쉽게 이해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며 각 지방 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옥에서는 향토 음식을 함께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즐겁게 지내던 옛날이 그리워진다.김동진(경희대), 정희갑(서울대), 구두회(숙명여대), 백낙호(서울대), 이영학(서울대), 박찬석( 초기부터 우리나라의 원료 음악인 김순영(서울대), 제갈상(부산대), 김달성(단국대), (대) 김행사(평론가), 한경순(상명대), 김진명(동아대), 임금자(동덕여대), 김성혜(한세대), 고정 서울교대), 준기록(한양대), 청은모(한양대), 이명학(서울대), 안희숙(연세대), 박지수(성신여 화(부산교대) 주혜정(숙명여대), 김선자(전남대), 이인순(배재대) 등께서는 학회가 발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어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학회의 모든 회원들은 그 당시 그분들께 항상 감사 한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우리들은 모두가 배우고 연구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해마다 인문학적, 사회학 을 모셨으며 우리의 존경하는 원로 음악인들의 삶과 음악을 듣는 중요한 시간과 우리 회원들의 적 소양과 폭넓은 교양을 쌓기 위해 초청 교수로 우리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각계의 원로님들 연주 공연, 논문 발표 등의 보람 있는 기회도 가졌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라자르 베르만, 파 울 바두라 스코다. 데이비드 벌쥐, 한스 레이그라프, 도미니크 메를레, 아리 바르디. 안톤 디코 프... 그들과 함께한 렉쳐 리사이틀, 강연회, 세미나와 미스터 클래스 등은 한국의 피아노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원로음악인의 특강 교수로는 김자경, 김순애, 박민종, 임원식, 안형일, 오현명, 전봉조, 조상현, 제갈삼, 백낙호, 이영자, 이성균, 이강숙, 황병기, 이상만 선생님 등을 모 썼다. 또한 시인 고은, 김남조, 조병화, 소설가 박경리, 한말숙, 김후란, 신달자, 철학자 김태길, 이 한빈, 이어령, 김동길, 권이혁, 이현재, 오명, 김학준, 김황식, 이인호, 최정호, 이명현 교수 등 한 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특강이 펼쳐졌다. 그 외에 1991년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음악인 및 인사가 참여하였으나 지면상 그 모든 분을 다 거명하지 못함이 아쉽다.4 어느덧 33년의 세월이 흘러 그 당시 20대, 30대 회원들은 이제 50, 60대의 중견 음악인으로, 40대, 50대 회원은 70대, 80대의 원로 음악인들이 되셨으며 유명을 달리하신 많은 원로분들께 삼가 명복을 기원합니다. 이 모든 분들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헌신으로 한국피아노학 회는 전문 음악인 약 1,0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명실공히 세계가 인정하는 대규모 학술 및 연 구 단체로 성장했다. 특히 한국피아노학회가 연구 개발하여 발간한 성인과 교사를 위한 기초 피 아노 교재 'The Piano 21C '가 한국 최초로 해외(베트남)에서 출판되어 피아노 교육의 수출이 시작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독일 유학 당시부터 일본 피아니스트들이 자국(일본) 작곡가의 작품을 반드시 한두 곡씩 레퍼토리에 넣어 연주하는 것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교재 개발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정서교육과 음악 교육 발전 그리고 출판문화 발전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악기 개발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함을 인식하며 피아노 교재 작업에 몰두하였고 2022년에 시작한 피아노 콘체르티노 프 로젝트는 이 작업의 연속이라고 하겠다. 이화여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5년에 이화여대에서 36년 반이라는 오랜 기간을 교수로 재직한 후 은퇴하였다.그리고 몇 년 후에는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이화여대에서 이루지 못하였 던대중 예술(실용 예술)의 고급화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등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또하나의 의무감을 갖게 하였다.그러므로 남은 여생 동안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연구를 계속하면서 작은 힘이나마 우리나라 음악발전을 위해 여력을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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