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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덕성 회장이 말하는 한일 첼로 교류 26년의 발자취와 미래

“음악은 외교를 넘는다. 첼로는 마음을 잇는다”

K-Classic News  기록·정리 |김은정 기자 

 

 

대한민국 예술원 나덕성 전 회장과의 인터뷰 

 

인연의 시작 — 1998년, 고베에서 우연히 건네받은 명함

 

1998년 또는 1999년, 일본 고베에서 열린 첼로 페스티벌에 딸의 오디션을 계기로 방문한 나덕성 회장은 그곳에서 일본어로 말을 거는 낯선 이와 조우한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독일어로 대화를 이어간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공통어로 소통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명함 하나가 건네진다. 그 명함에는 ‘국제 첼로 앙상블 협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그는 이후 일본 첼로계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듬해, 나 회장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사랑과 감사의 첼로축제"를 기획했고, 일본 측에 연락하여 초청을 제안한다. 그는 체재는 책임지되 초청비는 어렵다는 현실을 설명했고, 일본 측 인사는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첫 한일 첼로 교류가 성사된다.

 

 고베 1000인 첼로 페스티벌과 한일 첼로 네트워크의 확산

 

2001년, 고베에서는 전 세계 120여 개국 첼리스트가 모이는 '천 명의 첼로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 회장은 서울의 전문 첼리스트들과 전공 학생 40여 명을 이끌고 이 행사에 참여한다. 서울 챌리스텐이라는 국내 첼로 단체를 기반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한국팀은 그해 일본 무대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때부터 한일 간의 첼로 교류는 본격적인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나 회장은 “일본은 왕실 후원이 강하고, 조직이 체계화되어 있어 천 명이 모이는 연주회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매뉴얼은 없지만, 열정과 자발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월드컵 시기, 외교 단절을 음악으로 메우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일 관계는 교과서 문제 등으로 심각한 갈등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 회장은 “정치는 정치, 음악은 음악”이라며, 일본과의 약속을 지켜 세종문화회관과 요코하마 예술회관을 오가며 200명 규모의 교류 연주회를 성사시킨다. 당시 일본 왕실 서열 5위였던 타카마도노미야가 한국을 방문했으며, 나 회장은 이와 관련된 음악회에서 유일한 한국 측 접견 인사로 그를 만나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연주는 세종문화회관의 장소 후원과 자발적 인력 조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모든 일련의 활동이 이후 한일 음악 교류의 디딤돌이 되었다.

 

2025년,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 음악회로 이어지는 역사

 

2025년은 한일 수교 60주년의 해이다. 나 회장은 2024년 고베에서 열린 음악회에 지휘자로 초청되어 한일 첼리스트들과 함께 무대에 섰고, 이어 6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일본 프로 연주자 7~8명을 초청하여 양국의 교류 음악회를 성사시켰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교류가 아닌, 26년간 축적된 신뢰와 음악적 공동체의 결실이다. 그는 “100명이 모이는 연주도 시스템이 필요하고, 조직과 레퍼토리, 분배, 연습장소 세팅까지 모두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은 100년의 음악 행사 매뉴얼이 축적된 반면, 한국은 ‘하면 된다’는 정신과 자발성, 신속한 소통으로 운영되는 점이 대비된다고도 말한다.

 

음악을 통한 외교, 그리고 후속 세대를 위한 기틀 마련

 

이번 60주년 음악회는 단순히 추억의 연장이 아니라, 앞으로의 협력과 지속가능한 한일 문화 교류 모델을 제시한다. 나 회장은 공식적으로 지휘는 맡되, 운영은 후배 세대에 넘기고 있다. 오랜 동지인 홍성훈 교수를 비롯해 서울 챌리스텐 출신의 제자들이 현재 실무를 담당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이제는 제도적 기구와 기금이 필요합니다. 연속성 있는 교류를 위해선 시스템과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미 개인적으로 후원금 100만 원을 선납했으며, 이후 자발적으로 기금을 내는 연주자들도 늘고 있다고 전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 “음악은 외교보다 강하다”

 

나 회장은 덧붙인다. “교류의 시작은 작은 우연이었지만, 음악은 사람을 잇는 가장 강력한 언어입니다. 정치와 외교가 서로 벽을 세우고 있을 때도, 우리는 무대 위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가 지난 26년간 걸어온 길은 단순한 음악 활동이 아니라 음악 외교의 실천이자, 민간 교류의 모범 사례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악보를 들고 연습실로 향한다. 첼로는 아직도, 쉼 없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