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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노트 ] K오페라 대본이 중요하다, 명작 오페라의 첫 단추

한국 오페라를 보려는 유럽의 K 팝 세대가 기다리고 있다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어느 분야든 선진화된 영역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산업, 과학, 정치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 특히 오페라 영역에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 오페라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과는 성악가들이다. 세계적인 콩쿠르 석권, 유명 오페라 극장의 무대 장악, 그리고 각국 극장에서의 주역 기용 등은 ‘한국 성악’의 브랜드를 국제 무대에서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무대는 대부분 서양 레퍼토리 중심이며, 한국 창작오페라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그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대본 인식의 부재’다.

 

대본은 오페라의 기초공사다

 

대본 없이 오페라는 시작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인물이 노래하고 행동하고 갈등을 겪는 모든 극의 뼈대는 대본에 달려 있다. 아무리 탁월한 작곡가가 있어도, 빈약한 대본은 서사를 무너뜨리고, 인물을 공허하게 만들며, 관객의 공감과 감동을 잃게 한다. 이 점은 주세페 베르디(G. Verdi)와 자코모 푸치니(G. Puccini)의 창작 사례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베르디: 대본의 완성 없이는 작곡을 시작하지 않았다 『라 트라비아타』의 대본가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였다. 베르디는 “대본이 음악을 이끈다”고 단언하며, 피아베에게 수차례 수정을 요청했다. 결국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감정의 응축된 리브레토가 완성되었다.

 

『시몬 보카네그라』 초판 실패 후, 베르디는 오랜 침묵 끝에 보이토(Arrigo Boito)에게 대본 개작을 맡긴다. 이 극적인 재탄생은 ‘베르디 후반기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베르디는 대본가를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공동 창작자로 여겼다.

 

푸치니, 심미적 정밀함으로 대본을 통제하다

 

『라 보엠』의 경우, 루이지 일리카와 자코사의 대본 초안을 푸치니는 “산만하다”며 거부했다. 그는 일리카에게 구조적 재구성을, 자코사에겐 감정의 시적 정제를 주문했다. 그 치열한 3자 협업은 미미와 로돌포의 슬픈 사랑을 시대를 초월한 명작으로 승화시켰다.

 

『나비부인』 초연 실패 후 푸치니는 대본을 대폭 수정하며 “무대에서 울지 않으면 관객도 울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인의 시선으로 일본 여인의 감정을 섬세히 재구성한 결과, 세계가 눈물로 화답하는 오페라로 거듭나게 된다.

 

K오페라의 진화는 ‘대본 감각’에서 시작된다

 

다행히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오페라 아카데미, 서울시 오페라단의 카메라타,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개발 등에서 작곡가와 대본가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제야 “서로 인사를 나누는 수준”이며, 베르디와 푸치니처럼 작품을 두고 수백 번 다투고, 조율하고, 밀고 당기는 수준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K오페라는 이제 BTS 세대의 성숙한 취향을 고려할 때, 보다 깊은 문화적 내공과 서사적 통찰력을 갖춘 ‘작품성 있는 명작’이 요구된다. 이는 단순히 한류의 외피만 입힌 K오페라가 아닌, 대본-음악-연출이 유기적으로 융합된 ‘고유의 예술’로 진화할 때 가능하다.

 

대본의 시대가 온다

 

오페라는 단지 ‘노래하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정서를 끌어안고 인간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총체 예술이다. 대본은 그 중심이다. 세계적 대본가와 작곡가가 함께 걸었던 치열한 길을 K오페라가 이제 걸어야 한다. 환경이 열악하다고, 전용 오페라하우스가 없다고 주저할 때가 아니다. 명작은 대본에서 시작된다. K오페라의 진정한 출발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