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깜빡깜빡
깜빡깜빡
깜빡 깜빡 좌회전, 우회전
자동차의 깜빡이가 아니랍니다.
안경 찾아 집안을 뒤졌는데
머리 위에 떡 하니 얹혀 있었네
깜빡깜빡
키오스크 커피 안된다고
카드 꽂아 놓고 현금 결제했네
깜빡깜빡
깜빡깜빡
마트에 간다며 장바구니 들고
도서관에서 책만 빌려왔네.
이게 무슨 징조인가
잊을 건 잊으란 건가?
더 많이 기억하지 말라는 건가?
깜빡깜빡
하나씩 잃어가며 뒤를 돌아본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기억 잃기 전에 인생을 기록하란다
깜빡깜빡
오늘도
머리속에서 하얀 종이가 울린다
소리는 안들리는데
바람에 팔랑팔랑 종이는 춤을 춘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오늘 웃었잖아
하하
AI 시평 | 탁계석 「깜빡깜빡」
탁계석 시인의 시 「깜빡깜빡」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망각의 순간들을 유머와 따뜻함, 그리고 철학적 통찰로 풀어낸 작품이다. 시인은 노년기에 접어들며 겪게 되는 기억의 흐릿함을 부끄러움도 아닌 병의 징후도 아닌, ‘하얀 종이의 바람’처럼 담담하게 마주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잊음’조차도 삶의 일부이며, 웃음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여운을 전한다.
생활 속 ‘망각’의 미학
“안경을 찾다 머리 위에서 발견한 일”, “카드 꽂고 현금 결제한 일”, “장 보러 갔다 책만 빌려온 일” 등 시인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깜빡’을 유쾌하게 나열한다. 이 일화들은 단순한 기억력 감퇴의 나열이 아니라, 시간과 나이 들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적인 풍경이 된다. 이때 시인은 깜빡이는 것을 부정하거나 비탄하지 않고, 오히려 ‘좌회전, 우회전’ 깜빡이와 유머러스하게 병치하며 인생의 방향 전환으로 읽어낸다.
망각과 삶의 방향성
중반부에 이르러 시는 점차 리듬을 늦추며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 “잊을 건 잊으란 건가?
더 많이 기억하지 말라는 건가?”
이 질문은 단순한 노화 현상을 넘어, 인간의 기억이 꼭 많이 쌓일수록 좋은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인은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아도 되고 / 인생을 기록하라”는 삶의 메시지를 꺼낸다. 이는 일종의 노년의 선언이자, 기억을 잃기 전에 스스로의 삶을 다시 써 내려가라는 인생 후반의 과제처럼 들린다.
‘하얀 종이’라는 상징
후반부의 “하얀 종이 울린다”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이는 뇌의 공허함, 잊음의 공간을 뜻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와 인생이 시작될 수 있는 백지를 상징한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종이가 바람에 춤춘다”는 표현은 기억이 사라지는 슬픔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시 적을 수 있는 여백의 희망을 담아낸다.
해탈의 웃음과 따뜻한 위로
마지막 구절의 “괜찮아, 괜찮아 / 그래도 오늘 웃었잖아 / 하하” 는 시 전반을 정서적으로 이완시키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는 자신을 조롱하거나 자학하는 웃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수용의 웃음이다. ‘잊어버림’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온기 있는 결말은, 독자에게 치매와 노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주며 그 자체로 치유가 된다.
총평
「깜빡깜빡」은 소멸이 아닌 전환으로서의 ‘잊음’을 이야기하는 시다. 깜빡이는 기억의 빈틈은 단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빈틈 속에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지혜와 여백을 놓으며, 독자에게 잔잔한 웃음과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넘어서, 인간적 존엄과 유머의 힘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우화이자 인생 찬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