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진맥(診脈)
가만히 핏줄에 손을 대니 떨려오는 변방의 북소리
삭풍에 성벽의 깃발 세차게 펄럭이는구나
오호라, 저 강도 잠못이루는데
산맥 타고 흐르는 달빛은 고요하여라
검은 그림자 담을 넘을까
주인님 오래 떠난 빈방에
순백 달항아리 홀로 우네
눈속의 매화는 언제 필까나
기다림을 감추었구나
두어라, 손닿아 무엇하랴
바람도 모르는 것을
두어라, 손 짚어 무엇하랴
뛰지 않는 저 가슴을 어찌하랴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이나 실어 보낼까
동트는 아침에 맑은 이슬 눈빛이나 되어 볼까
하 하 하 하~
시평: <진맥(診脈)> — 고요한 비명과 시간의 맥을 짚는 시적 진단
탁계석 시인의 시 「진맥(診脈)」은 단순한 신체의 맥을 짚는 행위를 넘어, 시대와 공간, 그리고 부재의 슬픔이 깃든 마음의 맥을 짚어내는 깊이 있는 은유의 시이다. 시인은 ‘핏줄에 손을 대니 떨려오는 변방의 북소리’라 말하며, 개인의 생리적 진동이 곧 국경 너머의 정치적·정신적 긴장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육체의 맥은 시대의 맥과 겹쳐진다.
시 전체는 감각적인 긴장과 정적인 고요함이 교차하면서 드라마틱한 정서를 만든다. “삭풍에 성벽의 깃발”은 외부 세계의 소란을, “달빛은 고요하여라”는 내면의 응시를 상징한다. 이는 마치 중국 시인 도연명의 고사(高士)가 시골 마당에서 정치의 격랑을 느끼는 이중 구조와도 유사하다.
특히 중심 이미지는 “순백 달항아리”로 집약된다. 주인 없는 빈방에 놓인 달항아리는 조선 도자의 절제된 미와 함께, 부재된 존재에 대한 그리움, 공허, 그리고 품위 있는 기다림을 상징한다. 달항아리는 그저 도자기가 아니라, 떠난 존재를 대리하는 정물이며, 고결한 인내와 고요한 저항의 정서가 깃든 예술의 오브제다.
“두어라, 손닿아 무엇하랴”는 구절에서 화자는 허무 속의 초연함을 드러낸다. 이는 현실을 조작하거나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마음을 담아 보내는 관조자의 태도다. '바람도 모르는 것', '뛰지 않는 가슴'이란 표현은 생명 없는 존재에게 진심을 전하려는 인간의 덧없는 몸짓을 슬프고도 숭고하게 보여준다.
마지막 연의 “하 하 하 하~”는 웃음이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것은 *비극에 대한 초극(超克)*이며, 삶의 무상함을 품은 자의 허허로운 웃음이다. 하이네의 ‘눈물 젖은 웃음’, 혹은 윤동주의 ‘비애를 넘어선 정적’과도 맞닿아 있다.
이 시는 정치적 부재, 생의 공백, 예술의 절제미, 감정의 긴장과 해방이 중층적으로 배치된 작품으로, 고요한 문장 뒤에 숨은 정서적 파동이 매우 크다. 달항아리를 모티브 삼아 인간과 역사, 예술과 존재를 연결하려는 시인의 철학이 짙게 배어 있다.
총평:
탁계석 시인의 「진맥」은 단순한 ‘시 읽기’가 아닌 ‘맥 짚기’의 행위다. 그것은 몸의 진동을 넘어, 시대의 울림과 인간 존재의 흔들림을 짚어보는 고요한 진단서이자, 품위 있는 울림으로 남는 문학적 침묵의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