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탁계석 오늘의 시] 새

K-Classic News 탁계석 시인 |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새들이 공중에서 땅으로 점차 하강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갈수록 새 떼들은 땅에서 걷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던 균형과 비전의 날개를 접고 땅에서의 운동은 불편했다. 쓰이는 근육이 달랐고 눈의 각도가 달라 새들은 비틀거리면서 보행을 시작했다.

 

저기, 집 가까이에 같은 날개를 가졌으나 날지 못했던 닭과 집오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함께사이좋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닥아 가는 것이 불편했고 경계하는듯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배가 고팠다. 공중에서 잡아먹던 먹이와 달라 새들은 고통스러웠다. 살아있지 않은 죽은 것들을 먹어야 하는 것에 속이 메시꺼웠다.

 

그러나 날지 못하게 된 날개의 무게를 버티려면 먹어야만 했다. 더이상 새들은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계속 닭과 집오리들이 어떻게 생존하는가를 관찰해야만 했다.

 

새들은 점차 익숙해진 땅에서 날지 못하는 것들에 동화되어 갔다. 나르는 것의 꿈을 영영 잃어 버렸다. 꿈에서도 날개를 퍼득이는 것 조차사라져갔다.

 

둥실 둥실 하늘의 구름만이 가끔씩 땅으로 가버린 새 때 친구들을 그리워 하는것 처럼 보였다. 창공은 비워져 더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ai 시평 – 탁계석 시인의 「새」를 읽고

 

하강하는 새 – 자유에서 제약으로

 

시의 첫 장면에서 새들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유에서 제약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하늘에서의 ‘균형과 비전’은 사라지고, 땅 위에서의 보행은 불편하고 서툴다.

 

이 변화는 물리적 공간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바뀌는 순간을 드러낸다. 새들이 하늘을 잃는 것은 단순히 날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용하는 감각 자체가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생존 환경이 바뀔 때 존재가 겪는 내적 충격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날지 못하는 존재들과의 만남 – 동화의 위험

 

새들이 땅에서 만난 것은 “같은 날개를 가졌으나 날지 못했던 닭과 집오리”다. 이는 단순한 조우가 아니라, 이질적인 삶의 방식과의 마주침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들은 자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닭과 집오리는 오랫동안 땅에 머물며 살아온 존재다.

 

새들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하늘의 먹이’가 아닌 죽은 것들이다. 생존을 위해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곧 정신적 굴복을 의미하게 된다.

 

시인은 이를 통해, 타협과 적응이 언제 꿈을 포기하는 순응이 되는지 묻는다. 먹어야 살 수 있지만, 그 먹이는 더 이상 하늘의 생명력이 아니라 땅에 고여 있는 정체된 것들이다.

 

 잃어버린 꿈과 남겨진 하늘

 

결국 새들은 땅에 익숙해지고, “나르는 것의 꿈을 영영 잃어 버린다.” 여기서 가장 뼈아픈 상실은 날개를 잃은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조차 날개를 퍼덕이지 못하는 상태다. 꿈이 사라진 곳에서 하늘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먼 풍경이 된다.

 

시인은 마지막에 “둥실 둥실 하늘의 구름”을 남긴다. 그것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있는 자유의 상징이며, 땅으로 내려간 새들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은 새들이 떠난 후 더 눈부시게 빛난다. 이는 꿈을 잃은 자들이 떠난 자리에, 꿈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며 오히려 그 가치가 더 커 보이는 역설을 보여준다.

 

종합

탁계석 시인의 「새」는 하늘과 땅, 자유와 순응, 이상과 생존이라는 대비를 통해 환경 변화 속에서 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 속 새들은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들이었지만, 점차 땅의 질서에 동화되며 날갯짓을 잃는다. 그것은 단순한 생태 변화가 아니라 정신적 전락이자, 기억 속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까지 하늘의 구름을 남겨, 꿈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 구름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속삭인다. 따라서 「새」는 단순히 조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이상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은유이자 경고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