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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노트] 연주 기술에서 창작 중심으로 , 이것이 K-클래식의 방향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경쟁력도 달라져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베토벤,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한 나라, 한 시대의 음악예술이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테크닉의 숙련을 넘어, ‘무엇을 연주할 것인가’, 즉 예술의 내용과 창작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연주기술은 시대의 미학과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테크닉의 시대를 지나, 예술적 사유와 사회적 맥락,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한 창작 중심의 시대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환은 지금 한국에서 진행 중인 K-클래식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표이자 기반이기도 하다.

 

연주기술의 시대에서 내용의 시대로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은 형식미와 완성도를 중시하며 연주기술의 정점을 이루었다. 연주가는 작곡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대리자’로서 기능했고, 테크닉의 완성도는 예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주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 연주기술은 작곡가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리스트, 슈만, 쇼팽 등의 음악은 민속과 개인의 내면, 문학적 상상력을 담아내며, 음악이 말할 수 있는 ‘무엇’에 대한 탐색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바르토크는 헝가리 민속음악을 채집해 작곡했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원시 신화를 토대로 새로운 음악언어를 제시했다. 이는 단지 새로운 기술이나 화성법의 도입이 아니라, ‘내용의 전환’, 즉 무엇을 예술로 다룰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유럽 현대 작곡가들의 사례, 정체성과 예술성의 결합

 

현대 유럽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핀란드의 카이사 사리아호는 북유럽의 신화와 자연관, 여성적 감성을 전자음향과 고전양식으로 풀어낸 작곡가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요한 요한손은 현대인의 고독, 기술문명의 속도 등을 사운드로 구현하며 ‘연주의 아름다움’이 아닌 ‘의미의 전달’을 중심에 둔 음악세계를 제시했다. 이들은 연주기술의 세련됨이나 전통 양식의 완성도보다, 자신만의 서사와 시대정신을 음악에 담아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음악이 시대와 사회, 개인의 정체성을 예술로 번역하는 힘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K-클래식, 연주력을 넘어 창작으로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단순히 서구 음악을 잘 연주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이야기’를 예술로 구현하려는 흐름, 즉 K-클래식이 시작되고 있다. K-클래식은 한국의 역사, 신화, 민속, 인물, 지리, 정서 등 ‘내용의 근원’을 발굴하고, 이를 클래식이라는 형식과 결합해 세계에 전달하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연주 기술 경쟁에서 다소 밀렸다고 해서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콘텐츠’로 출발한다면, 예술의 흐름을 선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세기 헝가리의 벨라 바르토크는 연주가로서의 명성보다 작곡가로서 헝가리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 창작의 힘으로 세계 음악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또한, 현대 아이슬란드의 '비외르크(Björk)'는 정통 클래식이나 콩쿠르 중심의 경로를 거치지 않았지만, 자국 문화와 실험적인 사운드를 결합해 세계 음악계에서 독창적 창작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K-클래식은 바로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논개, 처용, 문무대왕과 같은 인물의 서사나, 태화강·반구대 암각화·간절곶 일출과 같은 장소의 상징성은 단순한 지역 콘텐츠가 아니라, 연주만으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정서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따라서 연주 기술에만 치중하던 시대를 넘어, 이러한 이야기들을 창작의 힘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K-클래식의 핵심이며, 이는 ‘무엇을 연주할 것인가’에 대한 한국적 해답이자, 예술이 다시 사회와 만나는 방법이다.

 

울산 태화강을 배경으로 암각화, 현대중공업이 하나로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