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니스트 |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건설』 1939),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애비는 종이었다' 첫구절이 충격적이고 인상적입니다 천부의 시인 서정주가 스물세 살에 쓴 시입니다 국화옆에서, 귀촉도 , 동천, 푸르른 날 피와 본능과 운명을 격렬한 호흡으로 노래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
K-Classic News 원종섭 문화심리학 기자 | 메디치 효과 Medici Effect 이질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얽히고설킬 때 큰 에너지를 분출하게 되는 것을 메디치 효과라고 부른다 다양성의 빅뱅이다 Big Bang of Diversity 메디치 가문 The Medicis은 단테,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당대의 과학자, 문화, 예술인, 작가, 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이들의 활약으로 이태리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다양성의 빅뱅 Big Bang of Diversity 생물자원이 가장 풍부한 곳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엉키는 곳에 가장 왕성한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강과 강이 만나는 어구, 혹은 강과 바다 혹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갯벌 이런 곳에 가장 다양한 생물군이 숨 쉬며 살아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르네상스였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화가, 조각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인류를 중세의 암흑에서 구한 찬란한 문명기였다 그것을 가능했던 것은 예술가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가 덕분이었다 서양에는 14세기 무렵부터 귀족들이 예술가를
K-Classic News 원종섭 문학평론가 |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체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2003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창작과비평 redfox0579 섬세한 반응입니다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역설 물렁물렁한 묵 단단한 모습 작고 사소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인간과 반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감각 시인은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상상력입니다 쉽게 스쳐가는 일상의 작은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진지한 호기심이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 인간 위주로
K-Classic News 원종섭 문학평론가 | 묵화 墨畵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전집', 나남출판, 2005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겨납니다 시인은 화폭을 꽉 채워 그리지도 않고 요란스럽게 채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느낌도 들고 다 말하지 않은 여백도 느껴집니다 절제된 표현으로 여백의 미가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생략하고 소와 할머니만을 압축해서 표현했습니다 관찰자 시점입니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이 도치되기도 했구요 독자들은 여백 뒤에 숨은 내용을 생각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격앙된 감정으로 말을 타고 달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의 성숙함은 서서히 굳어져 간 것이겠지요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의 어떤 심정 제목 '묵화'는 먹의 짙고 엷음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묵화는 절제된 그림이지요. 할머니와 소의 눈망울 애잔한 느낌의 공유로만 유대감이 표현될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이고 심심상인(心相印)이지요. 소가 먹는 물은 맹물이 아니고 쌀뜨물일 것입니다 하루종일 함께 고단한 노동을 한 소에게 할머
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 |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1989 문학과지성사 기형도 「엄마 걱정」 엄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보다 엄마라는 호칭은 그 스스로 짠합니다 시인의 어머니와 가난했던 유년은 무서운 기억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포보다 더 진한 감정은 그리움일 것입니다 그 공포는 아버지의 부재와도 관계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공포보다 더 진한 감정은 그리움일 것입니다 유년 시절의 추억, 동경, 고독 무섭고 외로웠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5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분도 시인은 죽었지만 그의 시는 살아서 구천을 날읍니다 민주를 향한 간절한 바람 열망의 절규 소명 긴박한 공포와 시대적 아픔 처절한 절규와 비장한 의지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지를 안다면 숙연해집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애타게 갈망했던 우리의
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니스트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선집 담쟁이 2012 시인생각 시인이 전교조 교사로 해직된 후 살길이 막막했을 때였습니다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 도 나오지 않는 벽에 살면서도 담쟁이는 저렇게 푸르구나 자기만 살길을 찾겠다고 달려가지 않고, 100개의 이파리와 손에 손을 잡고 더디지만 한 발짝씩 나아가고 그렇게 다른 이파리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며 벽을 오르고,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고 연대감을 통한 시련의 극복입니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내립니다.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낙옆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참으로 짧습니다. -도종환 접시꽃
K-Classic News 원종섭 문화심리학 기자 | 사회에 흔들리는 선과 악 The good and evil swayed by society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선은 해야만 하는 일을 내가 손해를 입을지라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 악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무의식중 몸에 익혀간다. 그렇다 해도, 우리 안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 중 어느 것이든 행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그럼 어째서, 똑같은 상황에 놓여졌을 때 나쁜 짓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일까? 또한, 왜 자신에게 하등의 이득도 없는데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걸까? 우리 내면에 있는 선악의 판단 척도, 기준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까? 사회적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 타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행동을 사회적 행동(Social Behavior)이라고 한다. 사회적 행동을 좌우하는 큰 요인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태도(
K-Classic News 원종섭 문화심리학 기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 상대를 최고 연주자로 인간의 덫 Human Trap을 문화심리로 풀어라 문화 심리학 Cultural Psychology은 우리 일상생활에 뜻밖의 영향을 준다 자기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속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이 더 크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문화심리가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는 이 심리적인 법칙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통하여 생각해 본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란? 오케스트라 등에서 연주의 시작과 끝, 템포, 리듬을 통일할 뿐만 아니라, 다이나믹(Dynamic), 아고긱(Agogik), 프레이징(Phrasing)을 비롯한 음악적 표현에 필요한 모든 해석을 연주자에게 지시하여 작품을 재창조하는 음악가이다. 관현악이나 합창과 같은 집단적 연주에 대해 몸동작을 통해 통일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고도화된 음악 이론의 지식이 많아야 하며, 모든 악기의 특징과 연주 방식에 대해 두루두루 다 잘 알아야 한다. 영화의 감독과 유사한 포지션이다.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K-Classic News 평론가 원종섭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1968 <현대문학> 김수영의 풀은 그렇게 푸르고 가녀리고 아름답습니다 문체는 정신의 표현입니다 평범함이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이 지상에서 쓴 마지막 詩 입니다 1968년 5월29일, 그러니까 시인이 숨을 거두기 꼭 20일 전에 쓰인 이 시편은 김수영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문학> 8월호에 유고로 발표되었습니다. ‘풀’은 김수영 시의 극점이자 귀결점으로 우리 앞에 선명합니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반복과 대구와 점층을 통해 특유의 리듬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풀과 바람, 그리고 여러 동사들의 반복과 대구와 점층은 이 작품을 단순하지만 여러 겹을 두른 한 편의 음악입니다 리듬을 육체화하면서 풀은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고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