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lassic News 오형석 기자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선 2월, 북촌한옥마을과 이웃한 갤러리단정(대표 이영란)에는 고요하지만 깊은 생명의 울림이 흐르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국내 최대 내륙 습지 우포늪을 화폭에 담아온 중견 화가 이미경의 20회 개인전이 2월 28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우포늪 연작과 더불어 최근 완성한 신작까지 총 26점의 유화 작품이 소개된다.
이미경은 '우포늪 작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만큼, 한 장소와 장시간 호흡하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절제된 색채와 안정된 구도, 그리고 화면에 깃든 고요한 리듬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화려한 풍경 묘사나 극적인 장면 대신, 작가는 자연이 스스로 드러내는 순간을 묵묵히 기다리며 그 시간을 화폭 위에 옮긴다.

이탈리아 볼로냐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8년간 수학한 이미경은 귀국 이후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회화와 인물화 등 폭넓은 작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작업의 방향이 본격적으로 전환된 계기는 우포늪과의 만남이었다. 사계절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사라지며 공존하는 우포늪의 풍경은 작가의 내면을 깊이 흔들었다. 그는 "우포는 넓고 고요했어요. 여러 동식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풍경이 제 내면을 깊이 흔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속도를 늦추고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이후 작가는 틈이 날 때마다 우포늪을 찾았다. 여름에는 산책로를 벗어나 수풀이 우거진 습지를 직접 헤치며 걸었고, 초겨울에는 물안개가 자욱한 이른 새벽의 풍경 앞에서 한동안 같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 시간은 자연을 ‘관찰’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경험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감동은 '우포늪 이야기–흐르는 시간, 나를 찾아서'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 연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작은 배의 이미지다. 동양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절제된 색채의 흐름 속에 등장하는 이 작은 배는 작가 자신을 상징한다.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흐름 그 자체이며,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과 감정이 화면에 머무는 방식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허한 태도가 이 상징 속에 담겨 있다.
작업은 이후 더욱 확장된다. 자연과 인간을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시선은 '우포늪 이야기–여여하게' 시리즈로 발전했다. '여여(如如)'라는 제목처럼, 작가는 자연을 바꾸려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그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이 시리즈는 이미경 작가의 내면 상태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들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우포늪의 숨결'에 한층 더 집중한다. 빛과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무의 위치와 일출·일몰의 시간성이 만들어내는 화면 구성은 이전보다 더욱 간결하고 안정적이다. 화면에는 여백이 늘어났고, 색채는 한층 절제되었다. 이는 자연의 풍경을 재현하기보다, 그 안에 흐르는 시간과 호흡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고, 잠시 멈춰 서서 화면과 함께 숨을 고르게 된다.
작가에게 우포늪은 단순한 풍경의 대상이 아니라, 대자연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공간이다. 빛은 생명을 드러내고, 바람은 그 생명을 흔들며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전시장에 펼쳐진 우포늪의 물결은 소리 없이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생명의 에너지가 활기차게 흐른다. 인간과 식물, 새와 하늘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자연의 본질적 아름다움과 생명의 순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우포늪은 약 2.3㎢ 규모의 국내 최대 내륙 자연 습지로, 다섯 개의 늪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1998년 국내 최초로 람사르협약 등록 습지로 지정되었으며, 천연기념물 제524호로 보호받고 있다. 따오기와 큰고니, 붉은배새매 등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순환을 이어간다. 이러한 우포늪은 오랜 세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 온 공간으로, 지금도 국내외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봄이 본격적으로 생명의 환희를 드러내기 직전인 2월, 겨울을 지나온 우포늪은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경의 이번 개인전은 그 준비의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 회화적 성찰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머물 수 있는가. 그의 작품은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고요하지만 오래 남는 여운으로 관람객의 마음에 스며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