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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출간한 『부천지역의 역사와 지명연구』 통해 부천의 3.1운동 중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 재조명한 바 있어..

부천문화원 부천학연구소,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 이미 재조명

 

K-Classic News 최지은 기자 | 부천문화원과 부천학연구소는 부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부천의 대표적 지역학 연구기관이다. 특히, 부천학연구소는 매년 부천문화원과 부천시의 지원을 받아 역사·문학·지명학·한문학을 전공하는 전문연구자가 부천학 연구를 위해 매달 열리는 정례회의, 연간 학술대회 개최, 연간 발간되는 연구서 집필 등에 참여하고 있다. 그 결과 부천의 역사·문화·지명·민속 등을 주제로 연구서를 발간 중에 있으며,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부천지역의 만세운동 중 대표적 항일운동인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을 『부천지역의 역사와 지명연구』에 특별히 소개했다. 일명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은 전국적 3.1운동의 물결이 이어지는 중인 3월 24일 부천군 계남면 중리(현재 심곡동과 중동 일대)의 주민들이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와 수탈정책에 항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계남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비품과 서류를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과 분석은 『부천지역의 역사와 지명연구』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제 측 기록인 1919년 4월 2일 경기도 장관이 보고를 올린 공문이 그것이다. 공문에 기록된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의 주요 참가자인 심혁성 등은 부천군 계양면이 주소지로 되어 있고 공문 내용에는 소각된 민적부와 행정자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민적부와 대부분의 자료는 계남면이 아닌 계양면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민적부는 면사무소에서 관리하는 주민에 대한 기록으로 대부분 계양면 거주자들에 대한 기록이며 시장용 서류도 계양면에 있었던 황어시장 관련 내용이다. 또 계남면 면서기로 피해를 입은 이경응 역시 계남면이 아닌 계양면 면서기였음을 최초로 확인하고 집필한 연구자가 부천학연구소 권만용 연구위원(한국근대사 전공)이다.


특히 이 사건에 가담한 심혁성, 이담 등의 예심종결서(1919년 3월 13일)와 판결문(1919년 10월 29일)을 확인해 본 후 연구를 진행한 권만용 연구위원은 2019년 11월 22일 열린 공식 발표회를 통해서도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은 계양면사무소 습격사건을 잘못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개진했다. 김문덕 연구위원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현재도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어 언제든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출처: Cor Kim@moonduckim(유튜브 채널))


그런데 최근 ”부천의 항일운동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은 허구“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가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되어 부천문화원과 부천학연구소 연구위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미 2019년에 발간된 연구성과가 있고 연구발표회와 그 영상이 존재하는 마당에 이 사실이 새삼스럽게 처음 발굴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권만용 연구위원은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에 대해 ”3년 전부터 꾸준히 계남면사무소가 계양면사무소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 발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확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부천의 대표적 항일운동 장소가 계남면사무소가 아닌 계양면사무소가 되려면 추측과 정황 자료가 아닌 보다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계남면과 계양면은 당시 부천군에 속한 지역으로 모두 부천 사람들이 3.1운동에 참여한 사건임에도 현재의 행정구역이 인천과 부천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부천의 항일운동이 날조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왜냐하면 현재 부천시 일대인 계남면 소사리에서도 3.1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만세운동을 벌인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내용 역시 부천문화원에서 발간한 『부천지역의 역사와 지명연구』에 실려 있는데 ”24일 계남면 소사 부근의 6부락의 높은 곳에서 화톳불을 피워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소사주재소의 순사가 곧바로 해산시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때 소사리의 6개 마을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괴안리(현 괴안동), 범박리(현 범박동), 벌응절리(현 역곡동), 심곡리(현 심곡동), 조종리(현 원미동) 등의 주민들이 성주산에서 불을 피워놓고 만세운동을 벌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천군 계남면과 소래면에서는 750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인 사실과 계남면에서 80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사실도 『조선소요사건일람표』(1919년 4월 2일)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부천의 만세시위는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 외에도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만 부각시켜 부천의 독립만세운동이 없었는데 부천시가 시민에게 역사를 왜곡시키고, 날조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과도한 확대해석은 부천의 항일운동과 그 의미를 퇴색시킬까 우려된다. 또한 이에 부화뇌동하여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부천의 역사연구와 교육이 형편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다면 부천문화원에서 발간 중인 연구서를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