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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 상업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서양 예술사

1. 르네상스는 왜 피렌체에서 탄생했을까?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는 존재하는가?” 위의 문장은 프랑스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 출제된 논술 문제이다. 이처럼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술과 철학이 융합된 문제를 풀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췄는지를 평가한다. 대부분 국어, 영어, 수학 점수가 대입의 당락을 결정하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교육 환경이다.

 

정해진 정답은 따로 없어 우리나라 수능의 일반적 논술과 달리 광범위하고 주관적인 글을 쓸 것을 요구하며 특히 독창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를 따져 보기 전에 예술의 역사를 크게 바라보면, 역사적으로 예술의 시대가 획기적으로 새롭게 전환될 때마다 이전의 전통적인 것에 반역해 승리를 이룬 반역자들이 새롭게 예술의 역사를 써 내려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환경에 익숙한 나머지, 역사 속 예술가들 또한 지금의 예술가들처럼 늘 배가 고팠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서양 예술의 역사에서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예술가가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최초의 시대라는 점이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 시대까지는 예술 작품에서 예술가의 이름을 찾기란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작품 대부분이 예술가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아, 누구누구 황제의 시대, 누구누구 교황의 시대로 해당 작품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과 예술가에 있어 르네상스 시대의 획기적인 변화는 예술가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작품 가격이 제대로 치러졌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 그러니까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작품 평균가는 약 100 두카티를 받았다. 당시 볼로냐 대학의 교수 연봉이 30 두카티였음을 생각해 보면, 작품 하나당 교수 연봉 3배 이상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중세와는 다르게 르네상스의 발현지 피렌체에서 갑자기 예술가에게 이런 대우와 대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는 스위스 출신의 예술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가 그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1860》에서 밝힌 “르네상스는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와 생활 태도의 길을 열어준 근대 문화의 선구!”라는 말보다는 15세기 피렌체를 권력으로 장악하고 싶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의 안정적인 권력 유지를 위한 일종의 상업성 가득한 아트 마케팅(Art Marketing) 성격의 일환으로 진행된 결과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서양 예술사의 배경에는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예술 역시 상업적이며, 정치적 목적의 성격이 다분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권력 장악을 위해 섬세하게 설계된 고도의 아트 마케팅(Art marketing)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반도는 중부와 남부는 교황령(Stato della Chiesa, 754~1870)과 나폴리 왕국(Regno di Napoli, 1282~1799), 시칠리아 왕국(Regno di Sicilia, 1130~816),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1297~1861)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공국(Ducato, Duchy)의 공작령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대표적인 공국으로는 페라라 공국 (Ducato di Ferrara, 1264~1597), 밀라노 공국(Ducato di Milano, 1395~1797), 사보이아 공국(Ducato di Savoia, 1416~1860), 우르비노 공국( Ducato di Urbino, 1502~1625), 만토바 공국 (Ducato di Mantova, 1530~1708)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귀족 세력보다 상업 세력이 정치적 우위를 점했던 지역들은 재밌게도 공국(Ducato: Duchy)이 아닌 공화국(Repubblica(이), Republic(영)) 형태의 정치 체제였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점이 설명된다.    대표적인 공화국은 베네치아 공화국(Serenìsima Repùblega de Venèsia, 697~1797), 제노바 공화국(Serenìscima Repùbrica de Zêna, 1005~1815), 피렌체 공화국(Repubblica Fiorentina, 1115~1569)이었다. 세 도시 모두의 공통점은 중세 시대부터 상업 세력이 귀족 세력보다 우위를 점했던 도시였다. 

 

공작령인 공국(Ducato(이) Duchy(영))과 다르게 공화국은 레푸블리카(Repubblica(이), Republic(영))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대중:Public) 왕(Re는 이탈리아어에서 왕을 뜻한다)이 될 수 있는 정치 제도의 국가였다. 

 

[자코포 다 폰트로모(Jacopo da Pontormo, 1494년∼1556년)가 그린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의 초상화, 1518~1520] 

 

이런 피렌체의 특수한 정치적 환경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는 비록 비루하고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사업의 대성공을 발판으로 공화국 수장이 되어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세습 통치하는 군주제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공화국이라 하지만 이제껏 미천한 출신이 공화국의 수장이 된 경우는 역사적으로 찾아보기가 힘들고, 중세적 신본주의 시대가 계속되는 한, 더더욱 권력 장악이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세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와 시대 정신을 열고자 결심한다.

 

메디치 가문(La Famiglia di Medici)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시모의 선대는 미천한 직업이었던 약재상( Medici는 이탈리아어로 약재상들을 뜻한다. 메디치 가문은 독약을 잘 다루었다 한다)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휘장에서 발견되는 오렌지는 당시 부를 상징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오렌지로는 안 보이고 내게는 독약으로 보이는 걸!” 이라며 메디치 가문의 비천했던 과거를 끄집어내 껄껄거리며 비꼬기 일쑤였다 한다.

 

[그림 설명: 메디치 가문의 휘장은 당시 부의 상징인 오렌지와 교황을 배출한 가문이라는 표식으로 교황의 삼중관과 베드로의 천국 열쇠로 장식되어 있다.]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오렌지는 메디치 가문의 의뢰로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봄(春)’ (라 프리마베라: La Primavera)에서도 등장하며 그림을 잠깐 살펴보면, 그림 오른쪽 제피로스가 피렌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클로리스를 꽃의 요정 플로라로 변화게 하고 그림 중앙에는 마리아 대신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세상의 중심을 잡고 있으며, 삼미신 카리테스와 함께 결국 꽃의 도시 피렌체를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 왼쪽의 상업과 교역의 신 메르쿠리우스(Mercurius, 영어:Mercury))가 전령사·전달자·심부름꾼의 상징인 카두케오스(Caduceus) 지팡이를 들고 오렌지 나무와 하늘을 휘저으며 꽃의 도시 피렌체의 새로운 봄을 불러올 것이라는 모습으로 연출되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천했던 가문의 역사를 빨리 잊어주기를 바랬을 정도였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봄’ (La Primavera), 1480]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Medici, 1360~1429)는 고리대금업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고리대금업은 기독교 신자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비난받아 마땅한 직업이라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도맡아 오던 업종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런 업종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메디치 가문이 얼마나 비천한 가문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Medici)는 자신의 가문을 더는 이런 비천한 가문이 아닌 명망 있는 가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아들 코시모를 귀족 가문인 바르디 가문의 콘테시나 데 바르디(Contessina de’Bardi,1400~1473)와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바르디 가문(Famiglia di Bardi)은 한때 피렌체의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대장)로서의 명성이 자자한 가문이었으나, 1343년 가문이 운영하던 은행이 그만 부도가 나면서 가문의 가세가 급격히 하락한 시점이었기에 이 정략결혼은 바르디 가문이나 메디치 가문 모두가 서로 바라고 원하던 혼인이었다. 귀족 가문과 혼일을 통해 어느 정도의 신분적 위치를 확보한 코시모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중세 시대 신본주의의 대척점인 인본주의 철학을 내세운다.

 

인본주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꼭 귀족만이 공화국의 수장이 될 수 있다는 기존의 관습과 관념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이유와 배경이 될 수 있었기에 코시모에게는 인본주의 사상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코시모는 당시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패망한 동로마를 탈출한 인본주의자들을 피렌체로 대거 받아들이며 그들을 누오바 젠테(Nuova Gente: 새로운 사람: Gente는 이탈리아어에서 귀족 같은 이에게 붙이는 존칭이다)라 칭하며 우대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동로마에서 망명 온 그리스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1355~1452)을 초빙해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를 공부하였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에게 자신의 카레지 별장(Villa Medicea di Careggi)을 플라톤 아카데미로 개조해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학교로 운영하게 하였다.

 

코시모는 아카데미의 운영방식에 특별히 간섭하지 않았고, 마르실리오는 이런 코시모의 후원에 힘입어 플라톤의 저서를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코시모와 인문학자들은 마르실리오가 라틴어로 번역된 철학책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인문적 소양을 가꾸어 나간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 철학 연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인본주의 사상이 피렌체에 급속도로 물들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코시모 데 메디치는 전 유럽과 동로마 제국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고대 문헌과 고문서를 수집하도록 했다. 실제로 코시모는 컬렉션에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상대가 매각을 거부하면 책을 필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 철학서를 대거 수집한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고문서들은 45여 명의 인문학자를 고용하여 라틴어로 옮겨쓰게 하였으며, 1443년 산 마르코 수도원 (Basilica di San Marco) 안에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을 만들어 보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도서관은 피렌체 시민에게도 무료로 개방된다.

 

[그림 설명: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메디치 도서관 입구는 예술사에서 최초로 그가 꿈에서 본 둥근 계단이 등장하고 이와 함께 주요 창문이 막혀 있어 어둡게 조성되어 있어 환한 빛으로 가득한 실내와 확연하게 대조되는 모습으로 설계되어 “진리(학문)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라는 라틴어 경구와 성경 구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vos liberabit)!”가 잘 설명되는 설계로 유명하다.]  

 

여기서 잠깐 지금의 도서관을 뜻하는 영어 라이브러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의도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탈리아에서 도서관은 성경을 뜻하는 바이블(Bible: 이탈리아어로는 Blblio)에서 기원해 비블리오테카(Biblioteca)라 불렀다. 그리고 영어 라이브러리(library)의 어원은 리브레리아(Libreria)로 여기서 리브로(Libro)는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타(Liberta)가 어원이며, 바이블(Bible:Biblio)과 다른 성경적 내용이 아닌 ‘자유도서’를 뜻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에서 도서관은 르네상스 이전에 건축한 도서관은 비블리오테카(Biblioteca)라 부르지만 이후 건축된 도서관은 주로 리브레리아(Libreria)라 불린다. 

 

즉, 중세 신본주의를 탈피하고자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학문의 주요한 방향성인 인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편하고자 했던 메디치 가문의 숨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이후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1492)는 더욱 도서관의 컬렉션을 더욱 늘려나간다. 로렌초의 대리인들은 실로 많은 양의 고대 그리스 고전 작품들을 동방에서 찾아다녔고, 수집한 책들을 복사하고 피렌체에 인본주의 철학을 퍼트리기 위한 커다란 공방까지 운영했다. 그는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 철학을 연구해 플라톤의 이론을 기독교와 접목하길 원했다. 그리고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당시로서는 햇병아리 같았던 마사초(Masaccio, 1401~1428)를 발탁시켜 종교화에도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심게 만든다.

 

 

위의 마사초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대적 변화는 중세적 전통의 근엄한 마리아는 온데간데없고 아기 예수를 간지럽히는 제스처를 취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의 마리아이다. 아기 예수 역시 천진난만한 아기 모습 그대로이다.

 

다음의 마사초의 스승이기도 한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가 그린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두 그림이 서로 추구하는 지향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조토의 그림에서 마리아의 표정은 근엄하기 그지없고 예수 역시 마사초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천진무구한 아기 같은 모습이 아닌 다 큰 성인의 모습으로 실재적인 아기 모습과는 거리가 먼 표정으로 중세적 전통의 가치관으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마사초의 그림에는 그의 후원자(패트론:patron) 즉 주문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