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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평 개인전 '없는 그림전 (PAINTINGS)' 10월 12일~10월 31일

인디스페스 INDPRESS (서울종로구 효자로 31)

K-Classic News 탁계석 평론가  | 

 

 


<없는 그림 PAINTINGS LOST》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문헌으로만 남아있는 회화 기록에서 출발한 전시다. 예를 들어 이녕(李寧) 1200~?)의 예성강도,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그린 초상화, 안견(安堅, 조선 초기)의 대나무 그림 등은 소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그림이다. 지금은 이 그림 들을 볼 수 없지만 당대의 문서를 통해 다양한 해석과 상상이 가능하다.

 

2년 전에 <없는 그림> (2021)이란 제목의 첫 작품을 만들었다. 접힌 병풍들과 박물관 유리 진열장만으로 이루어진 설치이다. 이 작업에서 겉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병풍에는 정작 그림이 없고, 유물을 보존하는데 쓰이는 유리장은 비어 있다. 대신 유리 사방 면에 소실된 그림에 관한 발문, 일화, 사료 등에서 문장을 선별해 새겨, 작품이 부재(不在)하는 유리장 속의 공간은 관객이 글에 상응 하는 옛 그림을 상상하는 장소가 된다.

 

 

나는 개별 작품을 만들 때부터 "현존하는 글과 부재하는 그림"이 대비되는 프로젝트를 구상해왔다. 사료든 제화시(題畵詩)든 화가를 둘러싼 일화든 다양한 "그림 이야기"를 만날 때 마다 풍부한 이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잘 몰랐던 그림과 화가들의 이야기를 만나면 마음이 두근거렸고 나도 어떤 그림이든 그려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이 그림 없이 전한다.​​

 

"황룡사 벽에 그린 솔거의 노송은 마디마디 골격과 나무껍질, 줄기와 가지가 서려 엉킨 것이 너무나 핍진(眞)하여 제비, 솔개, 참새 등 온갖 새들이 왕왕 날아들어 어정거리다가 떨어졌으니 이는 아마 그의 예술이 원숙기에 들었을 때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색이 바래 나중에 그 절의 중이 단청을 보채한 후에는 다시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여성(李如星, 1901~?)이 솔거(率居, 통일신라)에 대해 쓴 글

 

"큰 비단 한 묶음과 갖가지 모양의 금빛과 푸른빛의 채단을 집 종아이에게 함께 부쳐 자네에게 보내네. 모름지기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을 그려주게. 온갖 꽃과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두고 가운데 남쪽으로 마루를 터주게. 그 앞뜰을 넓게 하여 패랭이꽃과 금선화를 심어놓고, 괴석과 해묵은 화분을 늘어놓아 주시게. 동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 천 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구리병에는 공작새의 꼬리 깃털을 꽂아놓고, 비자나무 탁자 위에는 박산향로를 얹어놓아 주게."

-허균(許筠,1569~1618)이 화가 이정(李楨,1578~1607)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자 하면 할수록 그 떠오르는 이미지에 가닿기보다는 화면 앞에서 주춤거리게 되고 때로 밀려나오는 듯했다.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글이 담고 있는 풍부한 상상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같았다.

 

신사임당의 산수화로 알려진 족자 두 점은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그림의 안료가 사라진 대신 바랜 얼룩과 소세양이 쓴 제화시만 남았는데 그 자체로도 훌륭한 현대미술처럼 보인다. "없는 그림"이 품고 있는 여러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없는 것 자체를 넘어서는 표현은 없다"는 생각과 더블어 옛날 화가들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는 판단도 들었다. 내 그림 실력이 모자라는 것은 둘째로 하더라도, 지필묵이 이 세계를 표현하는 최고의 도구이고, 세계와 모두에 대해 "말"과 "글"을 나눌 수 있었던 시대에서 나도 우리도 이미 멀리 떠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없다"는 잃다. 상하다. 사라지다, 잊다. 지우다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긴 시간의 압력이나 망각과 관계하는 이 "없음"을 "있음"의 자리에 되돌리는 것은 가능하기도 무의미하기도 하다.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일종의 상실감을 는다. 그렇다면 그냥 그 소외에 참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없기 때문이 역설적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가능성, 없어서 홀가분한 자유 같은 것들. "없음'의 소리, 그림, 문자들이 서로 노래하고 춤추도록 자유롭게 유희해 보는 것이다 <喜희喜히>, <루루루루루>처럼 기쁘거나 슬픈 그림(글자) <허, 무, 공 虛,無,空 >과 같은 무의미를 지시하는 문자그림, 붓을 대지 않고 그린 산수화 '같은' 이미지, 무대 위의 가수와 같은 병풍 <디바 Divas> 연작 등.

 

몇 년 전에 지금이 온전한 시대인지 회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헤지고 깨진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술의 어긋난 시간을 생각했다. 특히 이 "어긋남"이란 시차, 상실감, 불확실성 등으로 전통과 현대가 매끄럽게 만날 수 없는 어떤 체험과 같다. 그런데 "없는 그림들과 함께 보는 <문방사우>에는 좀 다른 의미가 더해진다. 그것은 이제 우리 앞에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림과 그 화가들에 대한 경의, 헤지고 쓸쓸한 모습을 통해서도 연결되는 느낌,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 되는 시간의 순환 같은 것이다.

•김지평 2023.

 

 

김지평 金池坪 Kim Jipyeong

 

김지평은 2001년부터 2012년까지 김지혜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때는 "책가도"를 중심으로 민화 양식이나 단청의 장식성 등을 당대의 언어로 새롭게 하는 것에 몰두했다. 2013년경부터 동양화의 재료나 화론 등을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해, 개인전 <평안도 平安道::圖>(2014)에서는 지도의 형식과 금니화 기법으로 가족사와 분단 문제를 다루었다. 《재녀덕고 才女德高》 (2017)에서는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 기존의 동양화 질서와 시선에 질문을 던졌으며, <기암열전 奇巖列傳》 (2019)에서는 "괴석도(怪石圖)"를 통해 미술재료, 표현과 지각의 방식 등 전통을 둘러싼 다양한 미술의 조건과 제도로 관심을 넓혔다. <먼 곳에서 온 친구들》(2020)에서는 장황에 깃든 문화적 의미를 중심으로 "재야"의 미술, 동아 시아 시각문화의 자연관과 몸, 탈식민적 상상의 가능성 등을 두루 다루었다.

 

작가 활동과 더불어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전시 공간 "산수문화"를 운영했 다. 최근 참여한 전시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프로젝트 공공X김지평) (강남대로 G-LIGHT, 2022), (Past. Present. Future> (송은아트 센터, 2022), (한국 근현대 미술기획전: 황혜홀혜 恍惚 兮兮> (경남 도립 미술관 2021), <이응노미술관 국제전: 산수억압된 자연》 (이응노미술관, 2019) 등이 있 다. 서울시립미술관, 송은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양평군립미술관, 일주문화재단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