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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밤, 듣기 좋은 곡, 목소리는 사랑보다 오래 남는다

비제 《진주조개잡이》 〈Je crois entendre encore〉와 알라냐의 기억의 미성

K-Classic News  손영미 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찬란한 봄밤에는 유난히 목소리가 먼저 계절을 적신다.
꽃은 지고 바람은 지나가도, 한 사람의 음성은 별빛보다 오래 귓가에 머문다.
그래서 봄밤에 듣는 음악은 늘 사랑의 현재보다, 지나간 사랑의 잔향과 기억을 더 깊이 흔든다.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는 감정을 격정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향기처럼 스며들게 만드는 예술에 가깝다.
그 섬세한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1863년 초연된 비제의 오페라 Les pêcheurs de perles이다.

 

고대 실론섬의 이국적 바다를 배경으로 우정과 사랑의 금기, 그리고 운명적 기억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비제 특유의 투명한 관현악 색채와 기억을 자극하는 선율적 서정성이 유난히 빛나는 프랑스 낭만오페라의 대표작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애절한 순간은 1막, 나디르의 로망스 **〈Je crois entendre encore〉**에 응축된다.

 

Je crois entendre encore,
Caché sous les palmiers,
Sa voix tendre et sonore
Comme un chant de ramiers…

 

“나는 아직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사랑이 끝난 뒤 인간 안에서 가장 늦게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장이다.
얼굴은 흐려지고 계절은 멀어져도, 한 사람의 음성은 귀 속 어딘가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비제는 이 장면을 물결처럼 흔들리는 바르카롤 리듬 위에 얹어, 기억이 밤바다 수면 위에서 출렁이며 되살아나도록 설계했다.
선율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과거로 되밀려 가는 감정의 조류를 만든다.
바로 이 절제의 미학이 이 곡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울부짖지 않기에 더 아프고, 낮게 속삭이기에 더 오래 남는다.

 

2009년 베르사유 궁전 정원 실황에서
테너 Roberto Alagna는 이 아리아를 단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사랑의 음성을 자신의 호흡 속에서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 파리 교외의 시칠리아계 음악 가정에서 태어난 알라냐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노래 속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젊은 시절 기타를 연주하며 카바레 무대에서 노래했고, 파바로티를 우상으로 삼아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키워 갔다.

 

1988년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글라인드본, 라 스칼라, 뉴욕 메트, 비엔나, 런던 등 세계 최정상 무대를 누비며, 프랑스어의 세련미와 이탈리아 벨칸토의 열정을 동시에 지닌 세계적 테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그의 나디르는 단순한 배역 해석이 아니라, 삶 전체가 축적한 언어와 호흡, 기억과 미성의 결정체로 들린다.
알라냐의 우수성은 단순히 미성에 있지 않다.

 

그는 프랑스어 특유의 모음을 숨결처럼 띄워 보내며, 단어가 끝나는 자리마다 감정을 한 겹 더 남겨 둔다.

 

특히 encore의 마지막 음절을 멈추기보다 사라지는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프레이징은, 사랑이 기억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소리 자체로 증명한다.

 

그래서 청중은 음정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뒤에 남겨진 그리움의 잔향을 듣게 된다. 이날의 연주는 “잘한다”는 감탄을 넘어, 테너가 얼마나 우아하게 애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품 미성의 정수였다.

 

이 무대의 향기를 완성하는 이는지휘자 Michel Plasson이다. 프랑스 오페라 해석의 거장인 그는 템포를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사랑이 사라지는 속도처럼 다룬다.

 

서두르지 않는 호흡, 얇게 풀어낸 현의 질감, 코르 앙글레의 몽환적 선율은 알라냐의 미성을 달빛처럼 감싸 안는다.

 

플라송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반주가 아니라, 사랑이 멀어져 가는 심리적 원근감을 그리는 봄밤 공기의 배경이 된다.

 

여기에 베르사유 정원이라는 공간은 이 모든 애절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왕실의 시간, 프랑스어의 섬세한 모음, 밤의 습도, 정원의 잔향이 만나 이 아리아는 단순한 오페라의 한 장면을 넘어 궁정의 봄밤에 되살아난 기억의 독백으로 변모한다.

 

결국 이 곡의 본질은 사랑의 절정이 아니라,
사랑 이후에도 인간 안에서 끝내 꺼지지 않는 목소리의 기억에 있다.

 

사람은 얼굴보다 먼저 잊고,
목소리로 가장 오래 사랑한다.

 

그래서 알라냐의 이 무대는 조용히 말해준다.

 

사랑은 떠나도,
한 사람의 음성은 영혼 속에서 가장 늦게 사라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