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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경 리뷰] 이천 통신사, 북과 거북이로부터 들려온 메아리

독일 쾰른 Ventana에서 열린 『Echoes of Korea, Voices of Europa』를 중심으로

K-Classic News 노유경 편집자 기자 

[노유경 리뷰]

이천 통신사, 북과 거북이로부터 들려온 메아리

2025년 5월 26일, 20시 

독일 쾰른 Ventana에서 열린 『Echoes of Korea, Voices of Europa』를 중심으로

 

쾰른의 한가로운 저녁, Elisabeth-von-Mumm-Platz의 한쪽 끝자락에 자리한 공연장 Ventana는 원래부터 고요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이날 만큼은 그 정적 안에 한국의 북소리와 현악이 겹겹이 스며들었다. 이 공연은 주독일 한국대사관 본분관과 한인회에서도 미리 홍보가 되었고, 꽤 기대를 모은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모이지 않았다. 장소의 접근성 때문인지, 공연 홍보가 충분치 않았던 것인지, 혹은 시각이 늦었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날의 연주가 지닌 울림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연장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장소가 아니라, 음악을 "건너는" 공간이다. 『이천 통신사 – Echoes of Korea, Voices of Europa』는 해외 초청 공연이라는 단순한 형식에 머물지 않았다. 이 무대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독일이라는 타자 공간 안에서 어떻게 울리는지를 실험하며, 전통과 현대가 서로를 견디고 조율하는 감각의 현장이었다.

 

 

공연은 이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기획되었으며, 이천 지역 고유의 민속놀이인 ‘이천 거북놀이’를 중심으로 한 1부와, K-클래식을 표방하며 피아노 5중주, 성악과의 융합 작품으로 구성된 2부로 나뉘었다.

 

북의 존재론, 거북이의 형이상학

'거북이'라는 상징은 한국인의 문화적 잠재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속 거북이는 느리지만 끈기 있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거북이는 단지 느림의 상징만이 아니라, 장수, 인내, 지혜, 그리고 공동체적 안정감을 아우르는 복합적 상징이다. 이러한 거북이가 사물놀이라는 폭발적 에너지와 결합했을 때의 낯섦은 오히려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연다. 익숙한 민속 장단 위에 얹힌 느리고 무거운 존재의 궤적은, 전통을 '느리게 다시 보기' 위한 구조적 장치처럼 작동한다.

 

1부는 '이천 거북놀이(Icheon Turtle Play)'로 시작되었다. 이는 농경사회의 공동체 의례로, 주로 추석 무렵 복을 기원하며 마을을 도는 행위에서 유래한 민속놀이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 퍼포먼스는 전통 재현을 넘어, 전통의 동작이 현재의 음악적 언어 안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거대한 거북 인형은 상징적 중심을 이루었으며, 북과 꽹과리, 징, 장구와 함께 타악적 공간의 축을 형성했다.

 

이러한 민속 의례는 유럽 각지에서도 발견된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페르히텐’(Perchten), 오스트리아의 ‘크람푸스’(Krampus) 행렬처럼, 악령을 쫓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주술적 행위가 음악과 가면, 행진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이천 거북놀이는 억압적 상징이 아닌, 순환과 공생, 그리고 축원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음악의 목적이 '위계적 정화'가 아니라 '집단적 공유'에 있을 때, 전통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치유의 자원이 된다.

 

 

K-클래식, 해석의 미학

2부는 현대 한국 음악가들이 한국 전통을 서양 클래식 문법으로 변형하고 재구성한 실험의 장이었다. 김우람(Uram Kim)의 편곡으로 이루어진 세 곡, 〈태평가〉, 〈한〉, 〈K-Traditional Songs〉는 피아노 5중주라는 서양실내악 형식 속에 한국적 선율을 주입했다. 이 시도는 단지 표면적 장르 결합이 아니라, 음악 어법 자체에 대한 성찰이었다. 특히 ‘한’이라는 정서는 단지 민속의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해석되었다. 억눌림과 울림, 여백과 긴장의 리듬 속에서 현악기들은 한국의 정서를 단지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화된 형식으로 구사해냈다. 이는 서양 전통 속에 동양 정서가 잠식하거나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충돌하는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낸다. 정조(情調)가 아니라 구조(構造)를 통해 전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 공연의 핵심 미학이기도 했다. 즉, 전통을 단순히 "그리운 느낌"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감정이 어떻게 형식으로 변환되고 소리 안에 조직되는가를 보여준 해석 방식이었다.

 

 

바르톡(Béla Bartók)이 헝가리 민속음악의 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헝가리뿐 아니라 루마니아 (특히 트란실바니아 지역),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민속 선율을 채집하였다. 그 중 루마니아 지역에서 채집한 음악을 바탕으로 구성한 작품이 바로 ‘루마니아 민속 무곡(Romanian Folk Dances)’이다. 김우람의 편곡은 마치 이러한 민속 채집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외부자의 수집이 아닌 내부자의 감각으로 재구성된 창작이었다. 이것은 민족음악학의 윤리적 기준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며, 단순한 모사나 차용이 아닌 자율적 재맥락화의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이소영(Soyoung Lee)의 안정된 반주 위에 재독 입양인 선자 베마이어(Sunja Wehmeier)의 섬세한 음색이 얹힌 〈강 건너 봄이 오듯이〉는, 동양적 서정이 어떻게 독일어권 감각에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짧고도 복합적인 곡이었다. 단지 서정적 감동이 아니라, 리듬과 어법의 이질적 충돌을 통해 얻어진 긴장감이 그 감상의 본질을 형성했다. 〈Ave Maria〉와 판소리의 결합은 이 공연의 백미로 언급될 수 있지만, 단지 성공적 결합이라는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융합이 구성적으로 얼마나 낯설고도 치열하게 구성되었는가이다. 원재연(Jaeyeon Won)의 소리가 지닌 서사성과 이응광(Eungkwang Lee)의 중후한 바리톤이 겹치며, 기도와 한이 같은 하늘을 향하는 두 언어로 펼쳐졌다. 이는 단지 장르 융합의 성공이라기보다, 동서양 영성의 조우이며, 더 나아가 음성학적 사유의 실험이기도 했다. 전통의 표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 해석과 연주자 간 협업을 통해 수행되는 '현재적 전통'이었다.

 

 

연주자와 해석자들 

공연의 중심에는 음악가이자 작곡가 김우람이 있었다. Love"Arts 상주 예술가로 활동하는 그는 단지 편곡가가 아니라 문화 언어를 다루는 사상가로 기능했다. 이소영은 성악 반주의 미학을 깊이 있게 구현했고, 이응광은 예술가이자 예술 행정가(이천문화재단 CEO)로서 기획과 해석 양면에서 개입했다. 유럽 연주자들인 니콜라 뒤퐁(Nicolas Dupont), 산더 헤이르츠(Sander Geerts), 라우렌티우 스바르체아(Laurentiu Sbarcea)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라는 모든 이질성 앞에서 높은 적응력과 해석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공연은 '다문화 협업'이 아니라, 다중 언어적 사유가 실제로 어떻게 소리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론과 실천의 접점이었다.

 

본 분관의 참석과 문화 외교의 층위

이날 공연에는 본(Bonn)에 위치한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본분관의 민재훈 관장도 참석해, 이천 문화사절단을 격려했다.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닌, 문화 외교의 실천 현장으로서 본 공연의 성격이 강조되는 순간이었다. 외형적 형식 없이 무대 뒤에서 연주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한국 전통예술의 해외 확산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표현했다. 예술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 정체성과 상호 이해의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이날의 만남은 공연 그 자체와 동일한 무게를 지녔다.

 

사유의 틀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반향

이번 공연은 단지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철학적 개입의 장이기도 했다. 동양 철학에서 '도(道)'는 보이지 않지만 질서를 지배하는 근원적 리듬을 의미하며, 이는 공자(孔子)의 『논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음악은 단지 미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양과 공동체의 조화를 위한 도구다. 이날의 연주는 바로 그러한 '도'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특히 이천 거북놀이가 보여준 순환적 구조와 상징성은 『중용』에서 말하는 조화(和)와 일맥상통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유가 공연의 맥락에 유의미하게 적용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진리의 출현'으로 보며, 예술작품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무대에서 드러난 한국의 전통음악과 그 해석적 재구성은, 단지 낯선 문화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 안에 놓인 '존재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소리라는 형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 한국의 존재론적 기호이자, '타자 속의 자기'라는 현대적 정체성의 언어였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은 공연을 미학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자 존재론적 탐구의 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유럽에서 한국을 듣는다는 것

공연의 마지막, 모든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라 거대한 태극기를 펼쳐 흔드는 장면은 분명히 한국 관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것은 국경과 시간을 넘어, 한민족의 정체성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감정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외국 관객의 시선에서는, 이 장면이 자칫 문화적 자긍심을 넘어 민족주의적 제스처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어, 일정한 거리 두기와 해석이 필요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는 이날의 공연이 단순한 예술 행위를 넘어선 '귀향의 감각'이었다. 오랜만에 한국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마치 잔칫집에 초대받아 배불리 먹고,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인 듯한 이중적 만족과 위안이 자리 잡았다. 이는 공연이 문화적 유희를 넘어, 공동체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쾰른이라는 도시에서 이천의 소리를 듣는 경험은 단순한 문화 소비가 아니라, 감각의 재배치였다. 독일의 청중들은 한국어를 모를 수도 있고, 전통 장단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감이 예술적 공명을 가능하게 했다. 언어 이전의 진동, 억양 이전의 숨결이 음악을 통해 전해질 때, 예술은 민족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된다. 음악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예술이다. 이날 공연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이 독일이라는 이방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유효하게 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그것은 '국제 교류'이며, 문화의 공존이자 예술의 사유였다. 그리고 예술이란, 그렇게 들려오는 거북이의 느린 걸음처럼, 느리되 정확하게 도달하는 언어다.

 

 

글: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K-Yul) 음악감독 겸 단장, 독일/서울 거주, 

Ynhovon1@uni-koeln.de ,인스타그램: Hangulmanse, kyul-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