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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경 리뷰]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30주년 기념 관현악시리즈 III <베스트 컬렉션>

국악, 웅대한 시간의 아카이브

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노유경 리뷰]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30주년 기념 관현악시리즈 III <베스트 컬렉션> 

2025년 3월 12일 19:30

국립극장 해오름

 

 

3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삶에서 성숙과 변화를 이루는 중요한 주기이다. 고대 문명에서 30년은 재생과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었고,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며 인류 구원의 길을 열었다. 불교에서도 30년은 깨달음을 향한 깊은 수행의 시간이며, 천문학적으로는 토성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주기로, 우주의 질서와 순환을 상징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지난 30년 동안 우리 전통 음악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현대적 감각과 창의성을 더해 한국 음악의 아름다움의 깊이와 가능성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그 여정은 마치 한 그루의 생명나무가 오랜 세월을 통해 단단한 줄기를 형성하고, 무성한 가지를 펼치며 풍성한 열매를 맺듯,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

 

 

2025년 3월 12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30주년 기념 관현악 시리즈 III <베스트 컬렉션>은이러한 30년의 여정을 음악으로 기념하고, 또 하나의 새출발을 알리는 무대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객석은 이미 감격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무대 위 작은 움직임조차 놓칠 수 없도록 극장의 공기는 팽팽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마치 전통 한지를 틈새마다 곱게 덧대듯, 소리의 여운이 극장을 감싸 안았고, 첫 곡이 시작되자마자 폭죽이 터지듯 화려한 개막이 울려 퍼졌다. 

 

한편 <국립>"National"이라는 명칭 자체에서도 깊은 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다. 독일에서는 연방제 국가의 특성으로 인해 “National“이라는 단어 사용이 상대적으로 드물며, 대신 "연방(Federal, Bundes-)"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는 지역적 다양성과 연방정부의 분권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문화적 배경과 더불어, 과거 나치 시절의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경계하는 역사적인 맥락이다. 반면, 한국의 “국립”은 정부의 공식 후원과 신뢰성, 공공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국가 예술기관으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상징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 이름만으로도 전통과 국가, 국민과 미래를 잇는 음악 기관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 30년의 무게는 단지 시간의 누적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꿈이 쌓인 예술의 연대기이자, 앞으로의300년을 향한 생명나무의 뿌리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 1부 – 봄날의 기억을 불러낸 시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 그 1부는 단순한 음악회를 넘어 지난 세월의 숨결과 오늘의 생동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특히 이날은 창단 당시부터 함께한 18명의 단원들이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는 공연이었기에,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음색이 더욱 깊게 마음을 울렸다. 공연의 서막은 박범훈 작곡의 <춘무(春舞)>국립국악관현악단의 초대 단장이자 작곡가인 박범훈의 이 곡은, 1996년 작곡 이후 지금까지도 봄의 소리를 가장 다채롭고 힘있게 그려낸 대표적인 국악 관현악곡으로 손꼽는다. 한상일 지휘자의 정갈한 손끝에서 시작된 이 곡은, 마치 봄날 첫 아침공기처럼 상쾌하게 공간을 채웠다. 대편성의 유니즌과 서정적인 멜로디는 봄의 서사 그 자체였고, 특히 피콜로를 연상케 하는 싱그럽고 깨끗한 피리와 마림바의 듀엣, 여기에 뻐꾸기 소리를 흉내 내는 대금의 선율은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귀를기울이게 했다. 마치 김소월의 시 「산유화」 속 구절,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가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이 곡은 음악이 아닌 계절 그 자체였다. 이 곡을 지휘한 한상일 지휘자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제2대 단장을역임한 인물로,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섬세하면서도 담대한 흐름으로 봄을 불러냈고, 그 봄은 단지 계절의 표상이 아니라 국립국악관현악단 30년 역사의 시작이자 현재임을 느끼게 했다.

 

이어진 무대는 많은 관객이 손꼽아 기다렸을 장사익의 노래 협연이었다. 가사와 넋두리를 섞어가며 시작된 첫 곡 「역」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짙은 한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이미 첫 소절에서 마음이 붙들렸다. 다음 곡 「꽃구경」에서는 처음 등장한 해금 반주가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왔는데, 해금의 가느다란 선율이 마치 꽃잎 사이를 스치는 봄바람처럼 감정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 「봄날은 간다」는 장사익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국악관현악이 함께 풀어내어, 단순한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지나간 시간, 보내야만 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라진 봄날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관객들은 조용히 따라 부르며,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음악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 수 있구나,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이날의 1부는 단지 ‘잘 짜인 무대’가 아니라, 지난 30년을 한순간에, 품에 안고 관객들에게 건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박범훈 작곡가의 시작이 있었고, 한상일 지휘자의 이어짐이 있었으며, 장사익의 울림이 있었다. 

 

 

임준희 작곡 국악관현악 <심향> – 향의 청각적 형상화, 절제와 집중의 미학

 

2부의 첫 곡은 임준희 작곡의 국악관현악 <심향(心香)>이다. 2018년 초연된 이 작품은 황병기의 가야금 독주곡 <침향무>를 오마주하며, 가야금의 정적이고도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오케스트라적 언어로 새롭게 확장한 작품이다. 이날 무대에서는 초연당시의 버전이 연주되었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전 상임지휘자 김재영의 손끝에서 다시 그 첫 향이 피어났다. 작곡가 임준희는 동양적 사유와 현대 음악 언어를 절묘하게 엮어내는 작곡가로, 한국 전통음악의 재해석뿐 아니라 오페라, 기악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전통성과 실험성의 교차점을 모색해 온 인물이다. <심향>에서 오마주된 황병기의 <침향무>는, '침향'이라는 향나무가 부패하거나 상처를 입고 수백 년에 걸쳐 향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침향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시간, 고통이라는 세 가지가 축적된 결과물이며, 바로 그 점이 <침향무>가 가지는 정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성찰적인 깊이의 핵심이다. 이러한 침향의 속성과 의미는 임준희의 <심향>에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단지 향을 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향이 만들어지는 시간의 밀도, 감정의 층위, 기억의 침전까지 음악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의 시작부터 양금, 비브라폰, 그리고 글로켄슈필이 공명하며 펼쳐낸 음향은 마치 수묵화의 ‘먹 번짐’을 닮아 있었다. 소리의 입자 하나하나가 아토날적 (atonal) 스칼라를 부유하며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의도된 자유로움 안에서 우연의 미학을 실현해 냈다. 한 점 한 점의 소리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공존하며, 향처럼 감각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다

 

해금의 3도 음정 상행과 하행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면서도 전개에 따라 미묘하게 변주되었고, 그 흐름은 문학에서 한 구절이 반복되며 조금씩 의미를 달리하는 율리시스적 기법을 연상케 한다. 처음엔 고요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있지 않은 듯한 어딘가 낯선, 그러나 익숙한 감정을 환기시킨다. 가야금은 이 곡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때로는 중심을 잡는서사시의 화자처럼, 때로는 반짝이는 환영처럼 음악의 흐름 속을 유영했다.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펼쳐지는 선율은 기억의 언저리에 놓인 잊힌 멜로디를 떠오르게 했다. 꿈인지 기억인지 분명치 않은 어떤 이미지처럼, <심향>은 존재하지 않을 법한 과거의 정경을 음악으로 빚어내었다. 이 곡은 그 자체로 향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느껴지고, 머무르지 않지만 오래남았다. 팡파르처럼 힘차고 외향적인 곡들이 다수의 악기와 다이내믹으로 무대를 채웠다면, 환희나 열반을 말하면서도 중첩적인 포르테를 선택하지 않고 그 대신 미세한 다이내믹의 변화와 소리의 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소금, 훈, 생황과 같은 관악기들의 숨결은 공기 중의 향의 움직임처럼 들리는데 숨을 나누며 공간을 흔드는 방식으로 청각 너머의 감각에 집중하게 했다. 작곡가가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분명히 황병기의 연주 기법과 미학이 은근히 배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황병기의 가야금은 때때로 침묵에 가까운 울림으로 존재했고, 그 여백이야말로 가장 강한 표현이었기에 조용히 머무는 것의 힘을 음악적 선택을 넘어 존재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처럼 느껴진다. 사라짐으로써 더 오래 남는 음악이었다.

 

최지혜 작곡 국악관현악 <감정의 집> – 매나리토리 위에 세워진 생명의 구조물

 

2부의 두 번째 곡은 최지혜 작곡의 <감정의 집>으로, 매나리토리에 기반한 국악관현악 작품이다. 매나리토리는 경상도 남부지역 민요에서 유래한 ‘미,라,도,레-레,도,라,솔,미’ 상행과 하행의 구조가 다른 선법이다. 군을 중심으로 한 선율 구조를 지닌다. 이 곡은 그 전통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감정의 다층적 구조를 형상화했다. 작곡가는 임진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지만, 듣는 이로서는 그 강을 직접 본 적이 없어도, 그 흐름 안에서 자연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곡은 강이 가지는 역동성과 유장함에 주목하며, 화성보다는 멜로디가 전면에 나서는 구성으로 청자의 내면과 직접적으로 만났다.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타악기의 독주 구간이었다. 이 순간, 타악기는 단순한 리듬의 장치가 아니라, 마치 고대 서사시의 주술사처럼 시간의 층위를 흔들고 감정의 파고를 몰고 왔다. 긴장과 이완, 반복과 변주의 흐름은 스티븐 라이히의 미니멀리즘음악을 연상시키며, 음 하나의 반복 속에서도 무수한 변화를 읽어내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장고의 역할은 단순한리듬의 틀이 아니라, 전체 음악의 심장처럼 기능했다. 그 박동은 ‘감정’이라는 추상적 공간을 실제의 집처럼 지탱하며, 청자는 그안에서 스스로의 감정과 마주하는 여정을 경험한다.

 

원일 작곡 위촉 초연작 <흥, 길군악> – 의식(儀式)으로서의 축하, 그리고 새로운 발걸음

 

국립국악관현악단의 3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 원일 작곡의 위촉 초연작 <흥, 길군악>은 국악의 뿌리 깊은 전통인 길군악, 즉 길에서 울려 퍼지는 흥겨운 군악을 모티프로 삼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걸어온 길과 다가올 미래를 아우르는 음악적 의례로 재탄생되었다. 작곡가 원일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제5대 예술감독으로서, 오랜 시간 전통의 정체성과 현대적 감각 사이의 균형을 탐구해 온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소리의 철학과 극적 구성력을 함께 품고 있으며, 전통을 복제하지 않고 재맥락화하는 데에 그 미덕이 있다. <흥, 길군악>은 총 3장(章)으로 구성되며, 각 장은 단순한 구조를 넘어서 하나의 서사적축의 전개를 이룬다. 1장에서는 제목 그대로 ‘흥’을 주제로 한다. 여기서 거문고의 술대가 위 아래로, 연속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듯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 흥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공동체적 에너지의 응집이며, 청중을 내면의 고양 상태로 이끄는 일종의 음악적 제의 같다. ‘지금’과 ‘변화’를 상징한 2장의 다양한 리듬 층위와 음향의 대비는국립국악관현악단이 지난 30년 동안 겪어온 예술적 진화를 투영하며, 동시에 미래를 향한 다채로운 가능성의 포문을 연다.마치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음악과 의례, 연극이 하나가 되던 순간처럼 3장에서 터지는 팡파르적 전개는 음악과 삶이 한데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스페셜 피날레 – 박범훈 작곡 <뱃노래>, 모두의 생명을 실은 음악의 배

 

30주년 기념 <베스트 컬렉션>의 마지막 곡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자이자 초대 단장, 그리고 한국 국악관현악의 개척자라 불리는 박범훈이 지휘하고 작곡한 <뱃노래>였다. 그는 국악계에서 단순한 음악가를 넘어 제도와 역사, 교육과 예술을 모두 움직인 인물이다. 만약 이 인물을 비유하자면, 그는 마치 드보르자크가 체코 음악에, 바르톡이 헝가리 민속음악에 남긴 족적과 같은 존재이다. 그가 작곡한 <뱃노래>는, 경기민요의 선율을 주제로 삼아 편곡된 관현악곡으로, 국악관현악이 지닌 음향적 잠재력을 극대화시켰다. 한국에도 수많은 뱃노래가 있지만, 이 곡은 서양의 바다를 품은 seafarer's chant가 아닌, 강과 민초의 숨결이 흐르는 뱃노래를 품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악기에 마치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쫀쫀하고 찰지게 결합하여 국악관현악만이 줄 수 있는 감칠맛을 드러냈고, 오랜 시간 함께 삶을 나눈 이들이 서로의 숨결을 알고 있는 듯한 편곡의 응집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무대는 더욱 특별했다. 현역 단원 18명과 함께, 창단의 기억을 함께 한 역대 단원13명이 (권용미, 이용구, 문형희, 박영기, 이용탁, 오세진, 이석주, 차영수, 김성미, 김영길, 정화영, 김규형, 박천지) 스페셜 출연하여 무대를 함께 채웠다. 이들은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졌던 조각들이 다시 하나의 배에 올라 국립극장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음향의 총합으로 모였다. 그 웅장함은 말러의 교향곡조차 무색하게 만들었고, 음악은 단순한 곡이 아닌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라났다. 무대 위 그들은 한솥밥을 함께 먹으며 세월을 나눈 심포지엄의 일원처럼 연대하고 있었다. 심포지엄은 고대 그리스에서 식사와 음주, 철학과 예술을 함께 나누던 자리를 의미하니 이날 무대는 단지 ‘공연’이 아닌, 기억과 예술이 함께 나눈 만찬이었다. 국악의 심포지엄이었다. 

 

글: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K-Yul) 음악감독, 국제독일교류협회대표,

독일/서울 거주, 

 

Ynhovon1@uni-koel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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