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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섭 리뷰]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 개막공연을 보고

마왕에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변박’이 있다

K-Classic News 관리자 |

 

 

축제의 각 연주회 모두 ‘겨울 여정’의 다양성 표현

 

사랑, 안식, 자유, 다시 사랑의 축제... 인생이 그렇다. 사랑했다가 때로는 홀로 안식을 취하고 싶고 더 큰 자유를 꾀하지만, 종래는 다시 사랑의 축제로 돌아오는 순례의 길이다.

 

지난 1월 20일 오후 7시 30분 제주아트센터에서 막이 오른 제5회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은 첫 곡부터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의 변박(變拍)을 노래했다.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은 첫날(20일) ‘사랑의 겨울여정’을 시작으로, ‘안식을 향한 겨울여정’(21일) ‘자유를 향한 겨울여정’(22일) ‘축제의 겨울여정’(23일)이라는 각각의 소주제들이 모여 대주제 ‘겨울여정’(Winter Voyage)을 관통해나갔다.

 

첫날 레퍼토리는 삶의 변박을 강조하기 위한 선곡이었을까? 지난 겨울 축제조직위 주최 ‘제1회 제주국제실내악콩쿠르’에서 전체대상을 거머쥔 레포렘트리오(Leporem Trio)가 라벨 피아노 트리오(Piano Trio in a minor)로 감정의 다양성을 채색해냈다. 리듬의 혁명가인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만큼이나 리듬을 조용히 어루만졌다가 송곳으로 찌르는 변덕의 변주(變奏)로 1914년 불안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라벨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쾌활과 경고, 묵상의 1악장이 끝나자, 서정과 긴장이라는 양가감정이 녹아든 2악장이 흐르고, 파사칼리아에서는 라벨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발림을 그려나갔다.

 

소동파가 그랬던가? ‘아무리 복잡한 것도 두루 보되 요점을 취할 줄 알아야’(博觀而約取 박관이약취) 경륜 있는 사람이라고... 라벨의 곡을 두고 소동파처럼 해석한다면, 그건 인상주의 모네가 그린 대성당 색채 같은 ‘인생의 변화무쌍한 변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레포렘의 연주 태도도 그랬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때의 두려움이 1악장에서 약간 느껴졌지만 이내 2악장부터 정치한 선율을 한 땀도 빠트리지 않고 음의 무늬를 그려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첼로의 농현은 브람스적인 선율에 다가간 듯 명징한 우울과 슬픔과 기쁨을 농락했다. 4악장에서 레포렘은 이 무대를 위해 탄생한 트리오처럼 격정의 연주로 3악장을 떠돌던 불안의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냈다. 

 

 

베이스 손혜수와 피아니스트 심희정의 슈베르트 ‘마왕’

 

아! 진정한 ‘인생의 변박’은 베이스의 손혜수와 피아니스트 심희정의 연주에서 방점을 찍고야 말았다.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Der Erkonig D.328)은 그야말로 삶의 변박을 핍절하게 표현한 대곡이었다.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절대 타자화’(他者化)를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위대한 문학을 본 적이 있는가? 

 

죽음이 두려워 아빠를 끌어안아도, 아니 아빠가 아이를 끌어안아도 결코 그 마왕을 내쫓을 수 없는 아버지의 한계에 눈물이 절로 흐르는 곡이다. 병원에서 내 딸이 죽어가도 그 생명을 대신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차라리 나에게 달라는 엄마의 울부짖음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엥프라멩스의 비극을 뼈아프게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래서 마왕을 들을 때마다 놀란다. 괴테의 시속에 담긴 절망의 늪을 불과 18세의 어린 슈베르트는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비극으로 연출해낼 수 있었을까?

베이스의 중후한 음성 아래 빠른 패시지까지 능란하게 표현해낸 손혜수는 뒤나믹과 소토보체를 넘나드는 음의 농담(濃淡)과 경중으로, 달래는 아버지, 쫓기는 아이, 유혹하는 마왕에 이르기까지 삼색의 변음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손혜수가 이토록 완벽한 연기를 소화해내기까지 피아니스트 심희정의 속주의 소화력과 낙폭이 큰 피아니즘이 아니었다면 그 감정표현은 덜 익었을 것이다. 말의 가속보다 더 빠른 속주로 손혜수의 목소리가 나아갈 ‘음의 골’을 준설기처럼 깊게 파내는가 하면, 마왕이 아이를 유혹하는 부분은 피아노의 건반들이 마치 뒤를 바라보는 듯, 공포의 색감을 도드라지게 연주했다.

이날 연주회에서 삶의 변박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레퍼토리는 단연 ‘마왕’이었다.

 

 

제주 최고의 실내악단 토니카의 슈베르트 송어

세 번째 레퍼토리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레퍼토리와는 다른 인생의 변박을 구현해냈다. 원래 청년 슈베르트보다 30살이나 연상인 바리톤 ‘포글’을 위해 작곡한 가곡 ‘송어’가 원곡이지만 피아노 5중주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맑은 시내에서 헤엄치고 있는 송어는 과연 영원히 놀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누군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인간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질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 열심히 일한다면 그 또한 누군가 시기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 깨끗한 물이라면 송어는 분명 포식자 낚시꾼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가곡은 행복에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물고기 송어의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인생의 변박이 아니고 무엇일까. 

 

피아노 5중주 ‘송어’는 가곡 ‘송어’와는 전혀 다른 미장센을 갖고 있다. 단지 가곡 ‘송어’의 선율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 가곡 송어의 비극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가곡 ‘송어’는 물이 맑아 고기가 잡히지 않자 낚시꾼이 물을 흐려놓은 후 송어를 기어코 잡고야 마는 부분이 절정을 이룬다. 피아노 5중주 ‘송어’는 맑은 물의 송어가 느리거나 빠르게 노닐면서, 때로는 윤슬을 활기차고 생생하게 뚫고 나오는 모습만 표현했을 뿐이다. 

 

제주 최고의 실내악단 ‘토니카’가 연출한 1악장에서의 색채감은 연주 중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풍부했다. 2악장에서는 아리아적인 성격 역시 모자람이 없었고, 3악장의 푸가적 대화는 송어끼리의 지느러미 대화처럼 흥미로웠다. 그러나 역시 송어의 ‘맛’은 4악장. 가곡 ‘송어’의 멜로디에 졸던 관객도 눈을 번쩍 뜰 만큼 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토니카의 더욱더 신중하게 연주하는 폼새가 엿보였다.

 

 

대중적인 작품도 클래식 뼈대 위에 구축

 

첫날 연주가 끝난 후 조직위원장 심희정 교수는 ‘슈베르트 마왕이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를 가장 확실하게 압축한 것 같다’는 감상평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과 함께 손혜수가 노래한 ‘백학’과 슈베르트의 ‘송어’ 등은 이미 여러 드라마나 영화의 OST로 익숙한 것이지만 클래식 실내악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다. 

 

“비유하자면 대중성을 위해 가요를 부른 게 아니라 클래식의 뼈대를 알리기 위해 대중적인 곡을 런칭한 셈이죠. 보통 실내악은 작은 편성의 ‘악기 연주’라고만 생각하는데 ‘사람의 목소리야말로 최고의 악기’라는 말이 있듯이 성악도 실내악과 어울리는 가장 뛰어난 ‘악기’입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꾸준히 초빙해 실내악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심희정 교수의 손가락을 보았다. 마왕과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피아노로 표현한 여리고 가는 저 손가락. 순간, 손가락이 왜 다섯 개인지 깨달았다. 세상은 선과 악, 신과 악마, 우성과 열성과 같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것처럼 ‘다층 구조’로 이뤄졌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섯손가락이 필요하다는 걸... 그러기에 마왕을 그리도 잘 표현해내지 않았을까?

 

글 김종섭 월간리뷰 발행인

한국예술비평가협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