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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예술의 역사는 반역의 역사이다.”

예술을 교과 시험에 반영하는 선진국들

K-Classic News 황순학교수  |

 

서양 예술이 체험의 해석이 아닌 이미지 파일과 텍스트로 이해하는 한계성 

 

새로운 예술의 시작은 기존의 예술에 반역을 꾀하고 그 반역이 성공하면 새로운 예술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시작된 예술 역시 얼마 안 가서 또 다른 반역에 직면하게 되는 숙명을 가진다. 즉 예술의 역사는 반역에 성공한 반역자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술가들은 기존의 양식에 어떻게 반역을 꾀할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예술가 자신이나 그의 예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예술 교육 시스템 안에서 예술가들이 반역을 꿈꾸기란 무척 어려운 현실이다.

 

기존의 양식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배워야 하고 또는 알아야 하는 예술 작품이나 예술의 변천사가 우리의 역사가 아닌 대부분 서양의 것인 관계로 감각적으로 체화하며, 나만의 감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기존 양식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주요 작품을 통해 각 시대가 표방한 양식들을 이미지 파일과 텍스트를 통한 학습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제한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살다 보면 일상의 환경 속에서 예술을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경험재로써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 예술을 알아보기 위해선 박물관을 가거나 남아 있는 문헌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하지만, 유럽인들은 자신의 터전, 그러니까 집이나 사무실 그리고 공공건물들이 평균 500년 이상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관계로 일상에서 고전 예술이 던져 주는 감흥들을 평소에도 예술 작품 접근에 있어 제한이 없이 쉽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 환경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유럽의 이런 환경적 영향에 의한 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서술형 문제이다. 예술가들도 아닌 일반 고등학생에게 다음의 문제를 출제 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는 유럽에서는 예술이 우리처럼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이질적인 요소가 아닌 매우 친숙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2.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3.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4.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5. 예술 작품에 대한 감수성은 교육이 요구되는가?

6. 예술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할 수 있는가?

7. 예술은 우리의 현실 인식을 변화시키는가?

8. 삶이 아름다웠더라도 예술은 존재했을까?

9.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인가?

 10.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가?

11. 인간은 왜 미에 반응하는가?

12. 예술이 없다면 미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13. 예술 작품에 대한 감수성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가?

14. 예술가는 우리에게 뭔가 이해할 거리를 제시하는가?

15. 예술 작품은 언제나 의미를 갖고 있는가?

 

대입 시험 필수과목에 예술이 있는데 우리 도입 가능성은? 

 

대입 시험 필수 과목으로 예술이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도 위의 문항을 통해서 유럽 사회에선 일반 고등학생 수준에서도 예술의 영역에서 언제나 기존의 양식에 반역을 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럼 조화 비례 질서의 3요소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전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후대 예술가들이 어떻게 반역을 꾀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예술가나 예술 지망생에게 시사하는 점이 클 것 같다. 전성기 르네상스에 반역이 시작되는 시기를 르네상스 후기 또는 매너리즘이라 부른다. 즉 매너리즘 예술은 예술가들이 기존의 것들에게 어떻게 반역을 시도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술 장르이다. 그럼 르네상스와 다음 단계인 바로크로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했던 르네상스 후기 예술인 매너리즘에 관해 알아보자. 

 

현대의 개념에서 “‘매너리즘에 빠졌다!”라는 말은 결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니다. 누군가가 기존의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즉 타성에 젖어 새로운 시도나 새로운 개념 등을 시도하거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특히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주로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를 답습해 교묘히 새로운 것인 듯 ‘손기술이 좋은’ 예술가들의 시대를 매너리즘 시대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매너리즘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마니에라(양식,maniera)에서 왔으며, 양식은 이탈리아어 손을 뜻하는 마노(mano)의 복수 명사 마니(mani)가 그 어원의 출발이다. 

 

우리가 ‘매너’가 좋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젠틀맨 같은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젠틀’은 ‘친절함’이란 뜻으로 손의 제스처로 표현되기에 과거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조의 젠틀맨 문화에서 기원이 된 영어 ‘매너’는 ‘손’을 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너리즘의 어원이 손 또는 손기술(양식, maniera)이라는 점과 예술 양식이란 것이 결국 휴먼터치(Human-touche)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즉 손기술(양식, maniera)을 통해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낳은 천재적 예술가들의 양식에 반역을 꿈꾼 예술가들이 바로 매너리즘 예술가이다.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적 예술가들의 시대인지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보여 준 느낌의 예술이었다. 

 

100년에 한 번 겨우 나올 법한 예술가가 한꺼번에 그것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쏟아져 나온 시기인지라 후대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만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모나리자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아무리 조각을 미치도록 하더라도 미켈란젤로의 기량엔 절대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밀려오는 무력감은 르네상스 후대 예술가들에게 있어 형언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 이런 이유로 천재적 예술가들 이후 세대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첫 번째 그룹의 예술가들은 스승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하기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인 체사레 다 세스토(Cesare da Sesto)의 경우가 그렇다. 아래 작품은 체사레 다 세스토가 그린 《레다와 백조》란 작품이다. 

 

레다와 백조의 신화는 고대로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신화 속에서 레다(Leda)는 아이톨리아의 왕 테스티우스(Thestios)와 에우리테미스 사이에 태어난 딸로 스파르타 왕 틴다레오스(Tyndareos)의 왕비였다. 어느 날 에우로타스(Eurotas)강에서 목욕을 하던 레다는 마침 제우스의 눈에 띄게 되었고, 레다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의 곁에 다가가 레다의 품에 안는 데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위의 그림을 살펴보면 다빈치의 스케치를 제자인 체사레 다 세스토가 그대로 따라 그렸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첫 번째 그룹은 체사레 다 세스토처럼 무력감에 빠져 이전 천재적 예술가들의 정해진 화풍을 모방해 따라 그린다. 다음의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데 있어 문제가 되었던 난점들이 모두 해결되었으며 예술은 이제 완벽함과 조화를 달성한다.라파엘로가 약 400년 전에 그린 천사 이미지는 지금 봐도 이보다 더 나은 천사 이미지는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양식적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며 완벽한 작품성을 달성해 보인다. 

 

 

이처럼 르네상스 후기 예술가들 대부분은 기존의 천재적 예술가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따라 그렸기에 현재 우리에게 매너리즘이란 용어의 의미는 부정적 경향을 나타내지만, 당대 미술가이자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 따르면 매너, 또는 마노(Mano(伊))는 유사한 예술 작품의 바람직한 성격을 뜻하는 우아함이라는 말과 함께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아름다움, 기품, 세련, 능숙함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출발한 두 번째 그룹은 기존 예술이 지향하던 사실적 재현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과장하기 시작하며, 기존 천재적 예술가들에게 반역을 꿈꾼다. 

 

볼룩 거울이 만들어낸  왜곡으로 이미지와 가공된 아름다움 

 

그 반역자 중 선두 주자는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데리고 있던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1499~1546)와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데리고 있던 제자인 지롤라모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쫄라( 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 1503~1540)로 지금 우리에게는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파르미자니노에 의해 매너리즘 회화는 그 정점에 달한다. 당시 이발소에 걸려 있던 볼록 거울을 통해 비치는 왜곡된 이미지, 그러니까 지금의 어안 렌즈를 통해 전달되는 피사체의 왜곡된 이미지에 눈을 뜬 파르미자니노는 신체를 길게 늘어진 형태, 또는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자세, 그리고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조성 등으로 예술이 사실 재현적 세계에서 탈피해 최초로 인공적인 미의 세상으로 바꾼 최초의 예술가이자 반역자이었다. 다음의 당시 이발소에 걸린 볼록 거울(당시 기술적 한계로 인해 거울은 모두 볼록 거울이었음)에 비친 자신을 그린 자화상에서 왜곡된 이미지가 선사하는 인공적으로 가공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Parmigianino Selfportrait.1523~1524] 

 

그의 자화상을 보면 볼록 거울이다 보니 앞쪽에 있는 파르미자니노의 손이 사실보다 길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뒤쪽 사물의 모습이나 창문 또한 가공되고 조작된 공간 구성의 묘미를 잘 보여 준다. 다음의 《목이 긴 성모, Madonna dal collo lungo》에서는 더욱더 매너리즘 예술의 특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Parmigianino - Madonna dal collo lungo,1534~1540]

 

오늘의 만화 캐릭터도 눈을 크게 그리고 팔다리는 길게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화면 전체에 걸쳐 불합리한 요소가 산재한다. 전경, 중경, 후경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없고, 성모자가 조작된 공간 구성으로 인해 실내에 있는지 실외에 있는지 확실치 않다. 성모와 아기 예수의 인체는 마치 좌단 천사가 들고 있는 암포라 항아리 형태처럼 끝없이 길게 늘어트려져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처럼 가공되고 조작된 화풍이지만, 우리 눈에 성모와 아기 예수가 숭고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이다. 파르미자니노의 반역은 이렇게 대성공을 거두고 다음 시대 바로크 예술의 풍부한 곡선미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반역이 여전히 성공적인 것은 현재에도 인간이 포토샵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길게 늘어트리며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흡족해하며 인스타에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아래 만화 캐릭터처럼 눈을 크게 그리고 팔다리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런 순정 만화 속 이미지를 한 번쯤 누구나 꿈꿔봤다는 사실에서도 매너리즘 예술이 선사하는 감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의 이미지가 인간의 욕망을 이미 오래전 매너리즘 예술사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음이 확인된다.

 

 

매너리즘 예술은 이처럼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6~1593)에 이르러 더욱더 현실 재현의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어퍼컷 펀치로 한 방에 보내 버리며 반역에 성공한다. 그림입니다. 

 

 

베르툼누스(Vertumnus)는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가 1591년에 제작한 유화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여러 ​​과일과 채소, 꽃으로 구성되어 있어 현대적인 유머러스함을 가지고 있지만, 작품의 소재 특히 과일, 야채 및 꽃의 선택과 관련하여서는 당시 의도적인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아르침볼도의 이런 탁월한 감각적 선택은 로마 신인 베르툼누스(Vertumnus)에 대한 아르침볼도의 의도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로마 신화에서 베르툼누스(Vertumnus)는 계절의 변화와 식물의 성장, 그리고 정원과 과일나무를 관장하는 신으로 자신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과일과 채소의 사용은 루돌프 2세의 "지배자에 대한 세계 권력의 변화"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독특하고 매혹적인 예술 작품을 찾는 것, 르네상스 엘리트들 사이의 일반적 추세

 

루돌프 2세는 평소 자신의 믿고 좋아했던 수수께끼, 퍼즐, 기괴함에 대한 아르침볼도의 해석 방식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매우 만족해했다 한다. 독특하고 매혹적인 예술 작품을 찾는 것은 당시 르네상스 엘리트들 사이의 일반적인 추세였으며, 아르침볼도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루돌프 2세를 보기 좋게 매료시키며 그의 반역은 대성공한다. 이처럼, 매너리즘 예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흥미롭다. 특히 창업을 정말 고유한 제품이라 생각하고 시장에 제품을 출시해 보면, 이미 시장에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기존의 브랜드들이 이미 시장에 내놓은 제품이 허다하다는 점에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때 발휘해야 하는 능력이 매너리즘 예술이 전하는 틈새 전략이다.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용기있게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했던 것처럼, 기존 브랜드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찾아보고, 그 길이 인간의 욕망과 닿아있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이미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을 요망스럽게만 여기지 말고,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해결해 주는 손기술(매너리즘)이 바로 제품을 브랜드로 변화시킨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매너리즘 예술의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다빈치의 제자 체사레 다 세스토(Cesare da Sesto)처럼 기존의 양식(maniera)에 무력감에 빠져 기존 브랜드의 제품을 답습하며 하청 업체로 전락할지 아니면, 라파엘로의 제자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나 루돌프 2세를 매혹한 아르침볼도(Arcimboldo)처럼 기존 브랜드 제품의 아성에 도전하는 반역자가 될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의 몫이며, 그 반역의 실마리는 인간의 욕망을 건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감각이 발달 되어야 한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간의 욕망은 고맙게도 서양 예술사에 죄다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술 작품 감상과 직접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는 요소를 많이 발견해 훔쳐보시길 바란다. 제품에 충동이 계속된다면 충동은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면 브랜드가 된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대입 시험에는 우리와는 다르게 예술이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