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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칼럼] 리틀 아티스트 콘서트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황경익 이사장의 철학과 아이 사랑은 훌륭하다

K-Classic News 탁계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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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의 과제 

 

부모의 아이 사랑은 세계 공통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법이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는 과한 부분이 너무 많고 맹목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아이가 식당이나 질서를 지켜야 하는 공공장소에서 떠 들어도 무방비로 가만히 놔둔다. 남이 지적하면 바로 공격형으로 바뀌어 자칫 싸움이 된다. 이런 엉석받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라면 이 아이가 어찌되겠나.  부모의 품을 떠나서 부터는  혹독한 시련을 겪거나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사랑일까?  

 

독일의 경우 엄격함을 가르친다. 사랑을 넘치게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살아갈 수 있는 훈련에 주력한다.  가차없이 뺨을 때려 혼줄을 내어주는 것이 다반사다. 엄마의 태도가 아이에 일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자기 자식만 사랑하다보면 남에 대한 배려심이 자랄 틈이 없다. 주의 깊게 주변을 살리는 관찰력이 아예 없는 것이다. 배려가 없는 독주, 솔리스트 인간형은 그래서 살아 남지 못한다. 우리가 오케스트라에서 배우는 게 바로 앙상블이다. 남의 소리를 들으면서 내 소리를 조절하는 감각을 기르는 것이다. 

 

이 중요한 것들이 학교 예능 교육에선 이미 무너진지 오래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학교 교실에서 피아노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란 아이들의 정서가 어떻게 될 건가. 컴퓨터 음원이거나 동영상으로 대체한다니 체험이 기본인 음악 본질이 무너지고 있다. 그래도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만큼 무지하고 무식하고 냉냉한 사회다. 

 

 

일생에 영향력을 주는 예술 기초 교육은 체험에서 발생한다 

 

만약에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불량한 방부제가  들어간 식품 사고가 발생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소비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피켓 들고 심하면 식품 회사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냥 먹어도 애들에게는 몇 배의 가격을 주고도 친환경 식품을 먹인다. 

 

솔직히 6.25 전쟁 세대를 기준으로 보면 그 옛날엔 막먹고 막자랐어도  이렇게 대한민국 건설해 냈다. 그 때 기준으로 보면 모두가 왕세자, 왕세비처럼 대접을 받는 식탁이다. 뭘 말하려는가 하면, 먹는 것 보다, 입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듣는 것, 보는 것이란 말이다. 

 

한 끼의 식사보다, 어떤 전시회, 어떤 음악회 한번에서 받는 충격이 크고,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는 것이 기준을 넘어선 영양 상태가 되었으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 정신 문제. 홀로 고립의 문제, 사회성 결핍 문제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여기에 암기식 공부가 중요한게 아니라 창의력이 중요한 AI 시대다. 한국에만 머물기보다 글로벌 기업에 취직하는 경계가 무너진 세상을 살아 갈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예술교육은 선진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이 된다. 피카소를 이야기 하고 베토벤을 이야기 한다면 소통은 만점이다. 이런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 학교교육이 낙제점인 것을 모르지 않는 사회가 돼 버렸다.  이렇게 교육이 중요한데, 겁없이 대책도 없이, 5세 입학 문제를 덥석 내놓거나 외고 문제를 냈다가 교육부총리라는 어마한 자리를 한방에 날리는 것 역시 세상을 모르고 학교에서만 갇혀서 산 교수의 한계다. 지식은 많은데 응용력이 빵점인 세상 물정 모르는 인텔리인 것이다. 

 

좋은 소리, 좋은 그림 보는 것, 결코 가볍지 않은 일생의 행복 텃밭이다 

 

좋은 소리를 듣는 다는 것,  좋은 예술 환경을 체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모르면 아예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은 것의 가치다. 오늘의 부모들이 전 세대처럼 버스 안에서 막춤판 벌이던 세대는 아니지 않는가. 다 똑똑하고 현명한 부모들이긴 한데 헛 똑똑이란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한다. 

 

40 여년 전인가 키메라(Kimerav)는 성악가로 오늘날의 팝폐라 가수였다. 그 때 사람의 소리에서 저런 기교의 높은 소리를 듣고 너무나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일생 잊혀 지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를 방방 뛰어 다녔던 바내샤 메이 (Vanessa Mae)도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예술의 충격 감화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지 호텔 식사 한 끼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필자는 1978년부터  세종문화관 개관 이후 세계 거장 음악가들을 수없이 접하면서 예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가를 체험하였다. 

 

마리아 칼라스, 레타나 테발디, 스테파노, 헤르만 프라이, 카라얀. 피나바우시, 마고트 폰테인, 누리예프, 푸랑코 코렐리, 비르기트 닐스,  외르크 데무스, 수많은 피아노의 거장들, 기돈 크레머. 루찌에르 리치 등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음악가와 무용가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빛나는 보석의 보석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 

 

아이들은 백지와 같아서 그리는대로 수가 놓아진다. 먹는 것에 너무 치중말고 음악회, 전시회 데리고 다니면서 영혼에 훌륭한 것이 스며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중에 자존심이 되고 품격이 되고, 이런 것들이 쌓여서 인품이 된다. 일단 수준이 높아지면 낮은 것에 유혹을 받지 않고 물리칠 저항력이 생긴다. 입은 아무것이나 형편 따라 허용하지만 눈이나 귀는 자존심이 강해서

저급한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세상은 거꾸로다. KBS 방송 마저도 '내 나이가 어때서' 5~6세 꼬마 가수가 부르면 박장대소한다. 가요 부르면 어때서?? 우리 아이가 어때서??, 그럼 성인 흉내 내어도 문제가 없다면 담배도 피게 하고 술도 마시게 해서 비틀거리면 어때서라? 왜하지 않는가.  정서의 순백한 결은 나이에 맞게 주어져야 사람의 성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봄도 아닌데 먼저 더워져 피어 버리면 나중에 어찌되겠나를 좀 생각해 보셨는가?  

 

예전엔 손자, 손녀 안고 담배 피던 시절이 있었다. 개념이 없고 무식, 무지했던 시절이다.  우리 사회가 직선만 있고 곡선이 없는 것이나 은유를 모르는 것 역시  예술과 등을 돌리고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 주장이 옳아도 배려가 없는 주장은 오해나 왜곡을 부른다. 이런 것이 기초에서 부터  다져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스즈끼 기초 교육이 확산되어야 나라가 바로선다 

 

스즈끼 음악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의 행복 자산이자 미래를 여는 힘이다. 그간 얼마나 일본것 따라 한다고 박해를 받았겠는가. 적어도 이 교육 부문에서 우리는 일본을 발벗고 따라가도 한참 멀었다.  이런 기초 때문에 일본의 음악 동호인은 우리의 100가 훨씬 넘는다. 어릴 때 악기를 하거나 합창을 하였으니 이들이 기업 사장, 국회의원이거나 판사가 되면 스폰서도 잘 되고 조직이 탄탄하게 되니 안정된 사회를 구축한다. 

 

스즈키 음악회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이다. 그래서  평론가가 이례적으로  장문의 글을 쓴다. 아이들의 정서 창고에 롯데콘서트홀의 하모니는 무대에 선 아이들이나 객석의 또래 아이들 모두 소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어마한 돈을 들여 예능 교육시키던 시절은 지났다.  한 악기 배워주면 이들이 커서 잘 가지고 놀 수 있다면 아이는 부모를 존경하고 두고 두고 감사해 할 것이다. 황경익 이사장의 훌륭함이 여기에 있다. 리틀 아티스트 콘서트를  성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휘: 황경익

 

바이올린  황예지.  조별.  전제인. 차유진. 첼로  이채은.  원민.  변지민. 송우진. 무지유. 박주하. 박예나. 문시은. 딘하리. 곽동헌. 김서연. 강다경. 천호주. 최민규. 최서윤. 지연우. 채수민. 정예원. 이채빈. 이성은. 이서연. 원준. 윤아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