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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관 옆 미술관] 사과 - 폴 세잔

A Better Me
꿈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동물원 옆 미술관으로

 

K-Classic News  원종섭 평론가 |

 

 

 

 

 

 

 

세상을 바꾼 세계 3 사과

 

 

사과하면 어떤 사과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백설 공주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페리스 왕자의 사과?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바로

‘폴 세잔’의 사과 -화가 ‘ 모리스 드니’

 

 

 

 첫 번째 사과는 이브의 사과,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 마지막은 바로 세잔의 사과이다.

 

 

세잔은 고흐처럼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사과는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미술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개척한 사과로 유명하다. 

 

 

 

자연에 따라 그린다는 것은

결코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감각을 실현하는 것이다

 

 

 

법학도에서 화가의 길을 택한 세잔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법 공부는 지루하기만 했다. 마침내 1861년 세잔은 법 공부를 그만두고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 ‘아카데미 쉬스’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 구조의 힘을 색채로 표현하고자 한 세잔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의 정물화는 내 보물이야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이 그림만은 가지고 있을 거야

-고갱

 

 

 

세잔이 없었다면

현대 미술은 탄생되지 않았다

 

 

 

세잔이 위대한 3가지 

 

 

다시점

조형성

근본 형태 찾기

 

 

 

세잔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물체의 색상을 변경하는 것이 구조를 변경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의 작업은 회화가 선과 색상으로 대상을 모방하는 예술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 조형, 단단하지만 변경 가능한, 형태를 부여하는 예술이 아님을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한다. 

 

 

 

 

 

 

세잔!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였다

- 파블로 피카소

 

 

 

일종의 친애하는 그림의 신

—  앙리 마티스 

 

 

 

대부분의 새로운 화가들은 예술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 진지한 화가의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1906년 세잔이 사망한 직후, 1907년 봄 베른하임준 갤러리 에서 열린 그의 수채화 종합 전시회와 1907년 10월 파리의 살롱 도톤느 에서 열린 회고전 에 자극을 받아 그의 작품에 대한 생생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들 중에서 앙리마티스 와  앙드레 드랭이 세잔에 가장 먼저 열광했고, 그 뒤를 피카소, 페르낭 레제,  조르주 브라크, 마르셀 뒤샹 , 피에트 몬드리안이 따랐다 .  1949년 80세의 마티스가 세잔의 예술에 가장 큰 빚을 졌다고 말한 것처럼 오래 지속되었다. 

 

 

 

"그는 나에게 유일한 스승이었다"

"우리에게 보호를 제공한 것은 바로 그였다"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 가치 상승은 1999년 5월 10일 뉴욕 소더비에서 6050만 달러에 팔린 그의 그림 Rideau, Cruchon et Compotier의 경매에서 볼 수 있다 . 당시 가장 비싼 정물화였다.

 

세잔의 그린 멜론이 있는 수채화 정물화는 2007년 5월 8일 경매에서 종이에 그린 작품의 기록을 세웠는데, 2007년 5월 8일에 2,550만 달러에 팔렸는데, 이는 예상가 1,80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피사로, 기요맹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1863년부터 1866년까지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바로 낙선전에 참여하였으나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유명세를 탄 ‘ 에두아르 마네’를 친구 소개로 만나게 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세잔

 

기존의 그림에서는 유화물감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와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했고 세잔은 그런 새로운 기법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형태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해가 지기 전, 즉 빛의 양이 변하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 그러다 보면 유화물감의 성질상 짧은 터치로만 붓질을 하게 되어 외곽선과 깔끔한 면은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은 항상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게 되었던 것이죠.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보면 그는 붓 터치로만 해가 뜨는 파리의 풍경을 표현하려 했고, 결국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잔은 빛에 대한 색의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깊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차리고 그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세잔은 유독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모델이 고정된 포즈를 오랫동안 취해야 하는 인물화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경화와 달리 정물은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물은 마음대로 위치를 바꿔도 괜찮은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세잔이 그린 사과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곽선도 그림자도 진하게 그리지 않았다. 세잔 이전의 사과는 붉은 색채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빛과 그림자, 반사광 등을 넣어 사과처럼 보이게 하는 정해진 방법으로 그렸다. 그러나 세잔은 사과를 입체적이고 둥글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순색으로 붓질을 하였다. 붓질의 방향이나 터치로 생긴 자연스러운 반짝거림으로, 보는 사람이 더 직관적으로 사과라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구’ 동그라미 형태를 짧은 터치가 아닌 면과 붓질로 더욱 구처럼 보이도록 풀어내려 한 것이다.

 


순수한 색 면으로 대상의 형태를 견고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동시대 화가 ‘고갱’을 거쳐 야수주의 ‘마티스’에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형태와 각각의 대상들이 보여주는 다시점은 입체주의 ‘브라크’와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근대미술의 아버지, 세잔

 

 

 

 

 

평소 세잔은 ‘

그림을 그리다가 죽고 싶다.’

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말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폐렴으로 숨졌고, 일생 동안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세잔의 업적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업적과 비교하기도 한다

 

 

미술의 영원한 화두인 색채와 형태,

두 가지의 완벽한 조화를 위한 표현 방식을

새로이 발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완성되었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하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척한 빛의 색 또한 한낱 유행에 불과하게 만들어버린 화가. 현대미술의 대가 피카소와 마티스를 낳은 세잔을 근대미술의 아버지라고 칭한다.

 

 

 

 

 

 

 

고독한 시간의 확보

 

당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뜻밖의 능력자 입니다

 

 

 

원종섭   Won  Jong -Sup

시인,  교육학 박사,  대중예술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