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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dos Han 칼럼] 얼굴과 거리에서 사라지는 우리말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다시 발견해야 할 한글의 창조적 아름다움

K-Classic News  Erdos Han |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거리와 일상은 외국어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간판에는 영어가 넘쳐나고, 상품과 음식의 이름에도 영어가 빠지지 않는다. 카페의 메뉴판에서부터 패션, 광고, 공연과 전시의 제목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비롯한 외래언어가 우리의 생활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사람의 옷과 가방, 얼굴과 몸에까지 외국어가 하나의 장식처럼 새겨진다.

 

세계화 시대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영어를 배우고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능력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외국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보다 외국어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까지 영어로 바꾸어야 멋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자존감의 문제가 된다. 언어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한 민족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오랜 세월 축적된 감정과 기억의 저장소다. ‘그리움’, ‘정’, ‘멋’, ‘마음’, ‘여울’, ‘윤슬’, ‘노을’ 같은 우리말에는 사전적인 의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담겨 있다. 영어로 번역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이 지닌 소리와 여운, 그리고 우리 문화 속에서 형성된 감각까지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한글은 인간의 발음기관을 관찰하고 소리의 원리를 분석하여 만들어진 과학적인 문자이며, 동시에 천지인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품고 있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그 글자들이 다시 단어와 문장을 구성한다. 한글은 소리를 기록하는 문자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조형이 된다. 특히 예술의 시대에 한글의 가능성은 더욱 크다.

 

한글은 읽는 문자이면서 보는 문자다. 자음과 모음의 형태, 반복과 배열, 여백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 회화와 디자인의 새로운 조형언어가 될 수 있다. 문자 하나가 이미지가 되고, 단어 하나가 작품이 되며, 문장 하나가 하나의 풍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아름다운 문자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세계인이 한국의 음악과 영화, 음식과 패션, 미술에 관심을 갖는 지금, 정작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얼마나 발견하고 있는가. 세계화는 우리 것을 버리고 외국 것을 닮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와 만나면서 우리만의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과정이어야 한다.

 

한글을 사랑한다고 해서 외국어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 영어를 잘하면서 한글을 사랑할 수 있고, 세계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진정한 국제화란 자기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가지고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다.이제 우리의 거리와 생활공간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말보다 영어 간판이 더 많아졌는가. 왜 우리말로도 충분한 상품에 굳이 외국어 이름을 붙이는가. 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고급스럽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잃으면 문화의 고유한 색깔도 함께 희미해진다. AI가 세계의 언어를 실시간으로 번역하고, 국경을 넘어 수많은 문화가 서로 연결되는 시대다. 역설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만의 언어’다. 기술은 모든 언어를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떤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감정으로 삶을 표현할 것인지는 대신 결정해주지 못한다.

 

한글은 과거의 유산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새로운 디자인이 되고, 새로운 예술이 되고,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외래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얼굴과 몸, 거리와 건물에 새겨진 수많은 외래어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언어까지 두고 갈 필요는 없다.

 

한글은 이미 세계적인 문자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글을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창조적 아름다움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의 말이 살아 있을 때 우리의 문화도 살아 있다. 그리고 한글이 아름답게 살아 있는 곳에서, 한국인의 생각과 감정도 비로소 세계와 만날 수 있다.

 


Artist ERDOS HAN KYUNG 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