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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 “AI 초과수익은 누구의 것이 될까?”

“문화자본 없는 한국 사회에서 ‘대체불가 대한민국’의 미래?”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장에서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화두로 던지며 AI 시대의 초과수익을 국민과 나누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언급한 것은 단순한 수익 분배 정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AI가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이고, 특정 기업과 산업에 막대한 초과수익을 집중시킬 때 그 이익을 소수 기업과 주주, 고임금 노동자와 관료집단만의 성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국민 전체의 삶의 질과 사회적 품격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산업 구호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직 이 질문을 받을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국은 빠르게 성장했고, 제조업과 정보기술, 반도체, 배터리, 콘텐츠 산업에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그러나 경제 자본을 문화자본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여전히 약하다. 여기서 문화자본이란 단순히 예술을 소비하는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삶을 품격 있는 삶으로 인정하며, 부와 기술을 어떤 공공적 의미로 바꿀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의 능력이다. 문화자본이 약한 사회에서는 돈이 생기면 부동산, 주식, 성과급, 권력, 입시, 스펙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문화자본이 강한 사회에서는 돈이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예술교육, 지역문화, 공공디자인, 도시의 기억, 시민의 자존감으로 바뀐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표지 부분]

 

AI 시대의 초과수익 논의가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료집단은 재정 안정성과 제도 설계를 먼저 걱정한다. 재계는 투자 위축과 기업 경쟁력 약화를 말할 것이다. 노조는 노동자의 몫을 요구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현실적 근거를 가진다. 그러나 이 세 집단이 서로의 몫을 다투는 방식으로는 AI 시대의 초과수익을 국민 전체의 미래로 전환하기 어렵다. 관료는 수치로 계산하고, 기업은 이윤으로 판단하며, 노조는 임금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국민의 삶의 질, 여가, 예술, 교육, 감수성, 공동체, 도시의 품격은 쉽게 사라진다.

 

이것은 산업혁명기 영국이 이미 보여준 장면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세계 최초의 산업국가였고, 한때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 경제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 경제적 호황이 곧바로 인간다운 삶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산업도시는 성장했지만,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에 놓였고, 빈곤과 아동노동, 도시의 오염, 계급 격차가 심각해졌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회의 감수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바로 그 틈에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사회고발 소설이 등장했다.

 

디킨스의 작품은 산업혁명의 성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산업화가 만들어낸 도시, 제도, 빈곤, 냉혹한 계산주의(calculative rationality)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황폐한 집』, 『어려운 시절』 같은 작품은 통계와 경제지표가 감추는 삶의 고통을 서사의 힘으로 들어냈다. 특히 『어려운 시절』에서 디킨스가 비판한 것은 인간을 사실, 계산, 효율, 생산성으로만 다루는 태도였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학생을 성적으로, 노동자를 생산성으로, 기업을 시가총액으로, 도시를 집값으로, 문화를 조회수와 수익성으로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구빈원 임시 병동 밖 풍경. 루크 필즈, 1874년. 로열 할로웨이 칼리지]

 

이 지점에서 공리주의의 문제가 드러난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양적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했지만, 그것은 행복을 계산 가능한 양으로 환원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반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단순한 소비의 즐거움과 지적·예술적·도덕적 즐거움은 같은 차원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의 변혁기마다 실제 사회를 지배한 것은, 대체로 질적 공리주의가 아니라 양적 공리주의였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이윤, 더 높은 성장률, 더 빠른 효율이 우선되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깊어졌는가보다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그 결과 질적 공리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도 그랬고, AI 전환기의 한국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AI가 만든 초과수익이 사회 전체의 정신적·문화적 역량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시 소수 기업의 이윤, 일부 노동자의 성과급, 자산시장의 상승, 관료적 재정 관리 속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은 AI 시대의 주인이 아니라 AI 산업의 소비자이자 데이터 제공자, 노동시장 불안의 당사자로 남게 된다.

[이 사진들은 19세기에 장애인들이 대중의 구경거리로 전시되었던 ‘프릭-쇼’의 현실을 보여준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 문화는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당시 영국에는 클래식 음악회, 문학, 미술, 박물관, 과학 강연도 존재했다. 그러나 동시에 프릭쇼(freak show)와 기이한 신체를 구경거리로 만드는 대중오락이 크게 인기를 끌며 번성했다. 이는 단순히 저급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사회가 인간의 몸과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차이를 어떻게 상품화했는지를 보여준다.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을 스스로 교양 있고 도덕적인 계급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고통과 경제적 사회적 인종적 차이를 볼거리로 소비하는 감수성의 빈곤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세련되었지만, 인간을 대하는 감각은 당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 사회도 이와 크게 다르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우리는 세계적 기술기업과 K-콘텐츠를 자랑하지만, 예술과 문화자본을 국가의 핵심 의제로 다루는 데는 여전히 서툴다. 기업가들은 미술관과 공연장을 후원하기보다 부동산 개발, 주가 관리, 플랫폼 확장, 단기 수익성에 더 민감하다. 관료들은 문화정책을 복지나 산업 지원의 부속 항목처럼 다루기 쉽다. 대중은 문화조차 인증샷, 유행, 가격, 희소성, 브랜드 이미지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에서 AI 초과수익을 국민과 나눈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요구일 수도 있고, 가능하더라도 현금을 나눠주는 정책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초과수익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기본소득이나 국민 배당 같은 제도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AI가 인간 노동의 일부를 대체하고 생산성을 소수 기업에 집중시킨다면, 그 성과를 사회적으로 재분배하는 장치는 필요하다. 하지만 돈만 나눠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자본이 약한 사회에서 현금은 다시 소비, 투기, 사교육, 자산 경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AI 초과수익은 국민의 통장에만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민의 시간, 감수성, 교육, 예술, 공공공간, 도시 공동체의 기억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업가들을 설득해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독일과 미국에 추격당한 이유는 단순히 임금이 높거나 제국이 쇠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역사적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자본가와 상층부가 단기적 수익, 금융, 지대, 사회적 지위에 매달리며 산업의 장기적 혁신과 기술교육, 생산문화의 고도화에 충분히 투자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산업의 선두에 섰던 사회가 자신이 축적한 부를 더 깊은 기술문화와 시민적 역량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결국 후발주자에게 추격당한다. 돈을 많이 번 기업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번 돈을 기술, 사람, 교육, 도시, 예술, 신뢰, 상징으로 바꾼 문화자본이 침투한 사회가 오래간다.

 

한국 기업가들이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기업의 초과수익을 문화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기업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업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세계적 브랜드는 제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애플(Apple)이 단순한 전자제품 회사가 아니라 디자인과 생활양식의 상징으로 읽히는 이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이 도시와 건축, 장인정신을 함께 파는 이유, 프랑스가 패션과 미술관과 도시 이미지를 하나의 문화 권력으로 연결하는 이유는 모두 같다. 경제자본이 문화자본으로 바뀔 때 기업은 단순 제조자가 아니라 시대의 감각을 선도하는 존재가 된다.

 

[AI가 그린, 문화자본 도시로 유명한 파리]

 

반대로 문화자본을 모르는 기업은 아무리 많은 이익을 내도 결국 숫자만의 기업으로 남는다. 매출, 영업이익, 시가총액은 높을 수 있지만, 그 기업이 어떤 세계관을 만들었는지, 어떤 시민적 품격을 남겼는지, 어떤 도시의 기억을 만들었는지는 비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한계이다. 천민자본주의는 돈을 벌 줄은 알지만, 돈을 의미로 바꾸는 법을 모른다. 그것은 부를 축적하지만, 품격을 만들지 못하고, 건물을 세우지만, 도시를 만들지 못하며, 콘텐츠를 팔지만, 문화를 만들지 못한다.

 

‘대체불가 대한민국’이 되려면 이 수준을 넘어야 한다. 대체 불가한 나라는 단순히 반도체를 잘 만들고, AI를 빨리 도입하고,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과 부를 자기만의 문화적 질서로 바꾸는 나라이다. 한국이 진정으로 대체 불가해지려면 AI 초과수익을 국민 배당, 기본소득, 사회안전망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문화자본의 확충으로 이어가야 한다. 지역마다 도서관, 공연장, 미술관, 시민대학, 예술교육, 공공디자인, 청년 창작공간, 생활체육과 생활예술의 기반을 문체부 관리에서 벗어나 현장 예술가들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 국가가 예술가를 지원한답시고 장소 대여료를 받아 가는 지금의 정책은 부동산 개발업과 다를 바 없다. 국가가 예술가에게 장소 대여료로 단순히 돈을 받는 정책이나 관객 동원력 등으로 수치화해 평가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시간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예술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AI가 그린, 오페라 La Trviata 2막의 장면]

 

여기서 문화자본은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감수성이고, 산업의 장기 경쟁력이며, 사회 통합의 언어이다. 문화자본이 없는 사회에서는 초과수익을 두고 모두가 자기 몫만 주장한다. 기업은 투자 위축을 말하고, 노조는 성과급을 말하며, 관료는 재정 건전성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자본이 있는 사회는 질문을 바꾼다. 이 부를 어떻게 국민 삶의 질로 바꿀 것인가. 어떻게 다음 세대가 더 좋은 감각과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기술의 성과를 도시와 예술과 교육과 공동체의 품격으로 남길 것인가.

 

AI 시대의 진짜 위험한 점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만이 아니다. 더 큰 위험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 계산 가능한 수치적 존재로만 이해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성, 효율, 수익률, 성과급, 주가, 부동산 가격만으로 사회를 설명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디킨스가 비판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냉혹한 통계와 수치만으로 예술을 평가하는 폐해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 시대에 문학이 필요했던 이유는 통계와 수치가 말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오늘 한국 사회에 문화자본이 필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다. AI 시대의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인간의 존엄, 감수성, 불안, 욕망, 품격을 사회의 중심 의제로 끌어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AI 초과수익 논의는 조세 설계기술이나 복지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천민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의 시험대이다. 초과수익을 단순히 나눌 것인가, 아니면 국민의 삶을 높이는 문화적 기반으로 전환할 것인가. 기업가들은 이 질문을 비용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관료들은 이 질문을 재정 항목으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노조 역시 이 질문을 임금 협상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 AI가 만든 새로운 부는 국민 전체가 더 좋은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

 

산업혁명기 영국은 경제적 선두에 섰지만, 그 부를 인간다운 삶과 문화적 감수성으로 충분히 전환하지 못한 순간 디킨스의 문학적 감수성을 통한 사회고발이 시작되었다. 오늘 한국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AI 시대의 초과수익을 단순한 이익 배분이 아니라 문화자본의 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체불가한 국가는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체불가한 국가는 돈을 벌 줄 아는 나라가 아니라, 벌어들인 돈으로 무엇을 남길지 아는 나라이다. 한국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숫자가 아니라, 숫자를 인간다운 삶으로 바꿀 수 있는 감수성이다. 그 감수성의 이름이 바로 문화자본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구성원들을 동방박사들로 묘사하고 있으며, 중앙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는 이가 코시모 데 메디치이고, 맨 오른쪽 인물은 보티첼리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50년 동안 나는 돈을 벌고 쓰는 일만 해왔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쓰는 일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사치의 고백이 아니다. 그가 말한 ‘돈 쓰는 즐거움’은 소비의 쾌락이 아니라, 예술과 건축, 도서관과 도시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쌓은 부를 문화자본으로 전환하는 즐거움이었다.

 

실제로 코시모는 사적인 저택이나 가문의 위신만을 위해 돈을 쓴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피렌체의 교회, 수도원, 도서관, 학문 공동체에 지속해서 투자했다.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 산 마르코 수도원(Convent of San Marco), 산 마르코 도서관(Library of San Marco) 등은 그의 후원이 피렌체의 공공적 문화 기반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산 마르코 도서관(Biblioteca di San Marco)]

 

특히 산 마르코 도서관은 1444년에 문을 연 피렌체 최초의 공공 도서관으로 평가되며, 인문주의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코시모의 투자는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도시 공동체의 기억을 아름답게 설계하는 행위였다. 그는 돈을 멋진 건물로 바꾸었고, 멋진 건물을 지식의 공간으로 바꾸었으며, 지식의 공간을 피렌체 시민들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멋진 문화자본으로 바꾸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메디치의 돈은 숫자에 머물지 않고 피렌체를 르네상스 탄생의 도시로 우리는 기억한다.

 


[보티첼리의 봄(Primavera,1477–1482)은 매디치 가문의 통치의 정당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문화자본 투자로 인해 메디치 가문은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추방에서 피렌체로 귀환 이후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로 부상했고, 중간의 추방과 공화정 시기를 거치면서도 1737년까지 약 300년에 걸쳐 피렌체와 토스카나의 정치·경제·문화 질서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화자본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도시로 기억하게 만든다.

 

[AI가 원본인 사진을 그림처럼 꾸민 사례]

 

결론적으로, 지금의 한국에서 문화자본 국가론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이 맞다. 그러나 더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 한국 사회가 계속 현실적이라고 믿고 있는 부동산·주식·코인 중심의 삶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 더 비현실적일 수 있다. 모두가 자산 상승만을 바라보고, 모두가 차트만 보고, 모두가 더 빠른 수익률만 좇는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인간은 결국 숫자만으로 살 수 없고, 사회는 가격표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자본론은 당장 현실적인 해법이라기보다, 한국 사회가 지금의 “현실”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비판적 기준이다.

 

결국 “대체불가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앞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얼마나 더 벌 것인가가 아니라,
코시모 데 메디치의 사례처럼,
그 돈과 기술로 어떤 삶을 남길 것인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해도 한국은 매우 성공하겠지만, 고도의 피로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면 한국은 경제 자본이 지배하는 피로한 사회를 넘어 인간 존엄을 회복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자본 국가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