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비평가 회장
한희숙의 예술은 오랜 유랑의 흔적 위에 쌓인 감각과 사유의 층위들로 이루어진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수집한 색채와 질감, 감정의 파편들은 그녀의 손끝에서 조용한 춤을 추듯 되살아난다. 이
번 전시 〈유랑의 색깔 – 속삭이는 것들의 춤〉은 지난 30여 년간 이어온 여정의 궤적과, 그 여
정 속에서 길어 올린 내면의 서사를 회화적 언어로 풀어낸 작업들로 구성된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수제 종이, 천, 자개, 레이스, 스팽클 등 장식적이면서 감각적인 물성들을 수
집해왔다. 이들은 단순한 오브제를 넘어 감정의 기호이자 기억의 층위를 이루는 매개로 기능한
다. 특히 이번에 선보이는 48점의 드로잉 연작은 외부 세계에서 발견한 이미지들과 내면의 감각
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 자유롭게 겹쳐진 종이 조각들, 우연히 흘러내린 물감
의 흔적, 반복되는 선의 진동은 마치 무의식의 파편들이 화면 위에서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춤
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위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
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처럼, 작가는 내면 깊숙이 자리한 그림자와 마주하고, 이를 수용
하며 화해하는 수행의 길을 예술을 통해 지속해간다. 두려움과 결핍, 욕망과 연민 같은 말로 형
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은 빛과 색, 형과 질감으로 전이되어 하나의 정서적 풍경을 형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회화적 언어의 강화다. 과거 오브제를 중심으로 했던 작업
에서 벗어나, 물성과 회화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다 본질적인 형식 실험이 전개된다. 중첩된 붓
질과 유려하게 흐르는 색채의 리듬은 언뜻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작가의 삶과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이 모든 탐색을 관통하는 핵심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다. 작가는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매순간의 감정과 호흡을 들여다보며, 그 찰나들을 예술로 직조해낸다. 이는
내면의 상처를 정화하고 삶을 해방하는 예술의 실천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며, 타자와 자연에 대한 감각적 연대와 생태적 감수성으로도 이어진다.
한희숙은 고유한 색채 감각과 심리적 깊이를 바탕으로 삶의 복잡한 정조들을 찬찬히 응시한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수십 년간 축적해온 내면의 여행기를 풀어내는 자리이자, 관객이 스스로의
내면에서 ‘속삭이는 것들의 춤’을 발견하게 하는 조용한 초대장이 될 것이다.
안나연 큐레이터 | 갤러리위 청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