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석 칼럼]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는 흐르는 강물처럼

  • 등록 2025.06.30 03: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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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 인사의 자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제언

K-Classic News 탁계석 예술비평가 회장|

 

국립오페라단 제공 

 

낙하산 인사 시대를 벗어나 전문성 발탁을 

 

정권이 바뀌어도 강은 멈추지 않는다. 정치가 계절처럼 순환한다면, 문화는 그보다 훨씬 깊고 길게 흐르는 강물이어야 한다. 강줄기가 끊기거나 굴절되면 생태계가 무너지고, 퇴적된 가치와 경험은 소실된다. 문화예술이야말로 정권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되는 자율적 공공재다. 그러나 현실은 자주 그 반대의 흐름을 보인다.

 

한국의 공공문화기관, 국공립 예술단체는 수장이 바뀔 때마다 ‘정권 코드’ 논란과 ‘낙하산 인사’로 흔들려 왔다. 이로 인해 조직은 매번 새 출발을 강요받고, 장기 과제는 무산되거나 표류한다. 정작 창의성과 지속성이 생명인 예술 영역이 가장 짧은 호흡의 정책 운용에 노출된 셈이다. 기계나 설비가 자주 교체된다면 그것은 ‘고장’이거나 ‘불안정한 상태’라는 뜻이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한 조직이 자주 리더를 바꾼다는 것은 곧 내적 안정성이 결여되었음을 반증한다. 특히 예술의 리더십은 단기성과보다는 긴 호흡의 신뢰가 중요하다. 문화 예술이 정권의 도구가 아닌 사회적 자산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인사에 있어서도 전문성과 지속성이 최우선되어야 한다. 

 

문화 선진국의 운영 사례는 어떤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화 선진국의 운영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먼저 프랑스는 대표 국립기관인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을 5년 임기제로 운영하며, 성과와 전략에 따라 연임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은 단순 임명이 아니라 추천과 검증을 거친 공모절차로 진행되며,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기관의 수장은 그대로 임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2021년 임명된 로랑스 데 카르 관장은 정권 교체기에도 ‘공정한 절차’와 ‘성과 기반 검증’을 통과하여 루브르 최초의 여성 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녀는 “젊은 관객층 확대, 동시대 예술과의 접점 강화, 노후 시설 개선”이라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제시했고, 정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극장은 예술감독(총감독)을 선출할 때 이사회 주도의 투명한 절차를 통해 후보를 결정하고, 문화부는 승인만 하는 형식이다. 예술감독의 평균 임기는 6년 안팎이며, 일부는 연임을 통해 10년 넘게 재직한다. 2020년 취임한 도미니크 마이예르 역시 2025년까지의 임기를 보장받고 있으며, 코로나 위기와 정권 변화 속에서도 “기관의 안정성과 전문성 유지”를 이유로 중도 교체 없이 직무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단기 정치적 이해보다 예술의 자율성과 연속성을 더 중시한 결과다.

 

더 나아가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법 재단화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임지휘자는 단원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며, 그 임기는 보통 8~12년에 이른다. 2015년 선출된 키릴 페트렌코는 2019년부터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2027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다. 그는 장기 임기를 바탕으로 스트리밍 플랫폼(Digital Concert Hall) 같은 대형 사업을 기획하고, 세계 유수 공연장과의 공동제작 프로젝트를 꾸준히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치적 교체기와 무관하게 내부 합의에 의한 장기 비전 실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는 한국 문화예술계에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

 

잦은 교체보다 원숙한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할 때 

 

첫째, 공공 문화기관장과 예술감독의 임기를 더 늘리고 연임 가능 구조로 개편해야 한다. 현재처럼 2~3년 임기는 실질적인 기획과 성과 도출에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국공립 오페라단, 발레단, 공연장, 문화재단 등의 수장은 최소 5년 이상 중장기 비전을 세울 수 있어야 하며, 정책 성과에 따라 재임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추천제 및 전문가 다층 평가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추천은 공개 공모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술계·학계·비평계 인사가 참여하는 평가위원회가 실적, 리더십, 윤리 등 항목을 정량·정성으로 평가한다면 낙하산 인사 논란은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한국예술비평가협회 같은 민간 단체가 모니터링과 검증을 담당할 책임도 적지 않다.

 

셋째, 정책과 사업의 연속성 보장이 중요하다. 전임자가 시작한 사업이라 해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무조건 폐기하거나 손도 대지 않는 관행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콘텐츠의 세계 진출, 장기적 브랜드 구축은 몇 년 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정책의 단절은 예산 낭비일 뿐 아니라 창작 생태계 자체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넷째, 예술비평 생태계에 대한 국가적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 비평은 인사 검증의 나침반이자 창작 생태계의 공정한 기준이다. 정부의 비평 지원 사업은 단순한 기사 작성이 아니라, 전문 인력 양성과 비평 아카이브 구축, 인사 검증 체계와의 연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와 대중의 단기 인기에 흔들리지 않는 인사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술감독 선임이 포퓰리즘이나 감정적 비방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성과 실적에 기반한 객관적 평가가 인사와 정책의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지만 문화는 계속 흘러야 한다. 정치가 계절이라면 문화는 강물이다. 그 물길을 막지 않고, 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 정책의 본질적 책무다. 이제 우리 문화예술계도 예술의 고유한 자율성과 장기 안목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때다. 그래야 K-한류의 물결도 얕은 파도에 그치지 않고, 큰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서초문화재단 이사장 연임으로 성숙도를  

 

국립오페라단의 프로코피에프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모처럼 안정권에 진입한 국립오페라단의 예술감독 역시 연임을 위한 논의를 해도 좋은 평가가 아닐까 싶다. 최상호 예술감독이 그간 초연작들을 통해 보여준 무대가 합격점이란 성적표다. 무엇보다 탁월한 기량의 우리 성악가들의 자산이 유실되지 않도록 예산을 늘리고, 이제는 그 흐름을 상승시켜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서초문화재단의 강은경 이사장의 의욕과 결실도 돋보인다. 이처럼 우리 예슬계가 인사 실험기를 거쳐서 원숙기에 접어 들어야 한다는 신호탄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욕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이제는 오페라에서 터저야 할 때가 왔다.  '세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근접할 수 없는 무대 기술력의 축적된 힘과  환상적인 연출의 묘미로 한차원 높은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성악이 된 만큼 이제는 병행하여 우리 창작 K오페라도 기술력을 키워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연속성이 담보되어졌으면 한다. 

 

26일~29일 4회의 공연으로 초연작의 성공을 이끈 국립오페라단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탁계석 회장 기자 musict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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