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한때 예술은 뜨거운 입김처럼 솟구쳤다. 영감은 그 순간의 정적 속에서 낚아채는 살아있는 불덩이였고, 예술가는 자신의 심장에서 즉시 치솟는 노래를 즉석에서 연주하고, 읊고, 노래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음악 창작의 분업화는 이 ‘즉흥’이라는 고귀한 능력을 점차 주변부로 밀어냈다. 작곡가가 모든 것을 악보에 적고, 연주자는 그것을 ‘실행’하는 전문 기능인이 된 오늘날, 과연 우리는 ‘영감의 순간’과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연주자들은 대개 작곡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오차 없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완벽함 속에는 때때로 결핍이 있다. 그것은 바로 즉흥성, 곧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직관의 비약이다.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의 달인이었고, 리스트는 즉흥을 통해 관객과 직결된 소통을 만들어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 연주자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진행. 그것이야말로 영감의 실체가 아니었던가.
“즉흥이란 곧 신의 속삭임을 듣는 것이다.” 프란츠 리스트
이는 단지 과거의 미덕이 아니라, 오늘날 더욱 필요한 창조적 언어다. AI가 악보를 만들고 연주까지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인간의 독창성과 자발성은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하는가? 기계는 질서와 알고리즘으로 작동하지만, 인간은 흔들림과 깨달음, 혼돈과 직관으로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즉흥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예술가의 존재론’이며, 인간만이 가능한 창조적 발화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귀한 전통을 잃어버렸을까? 그것은 연주자와 작곡가의 분리, 예술의 제도화, 예술교육의 정형화 때문이다. 한때 거리의 악사들은 실연의 순간마다 새로운 선율을 뽑아내며 군중과 대화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의 기원이자, 가장 원시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지금 그 감각은 얼마나 허용되고 있을까?
“내 안에 음악이 있었다. 그것은 악보가 아니라 숨결이었고, 손끝이었다.” 파블로 카잘스
따라서 오늘의 연주자들이 다시 영감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창작의 재정의다. ‘비르투오조 영감 콘서트’는 이러한 시도다. 연주자가 시와 장면을 보고 즉석에서 선율을 만들어내며, 관객과 ‘지금 이 순간’의 예술을 공유한다. 그것은 작곡가가 다시 연주자의 감각에 귀 기울이게 하고, 작곡의 방식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선순환이다.
“즉흥은 미래의 작곡을 불러오는 시간의 모험이다". 야니스 크세나키스
이제 우리는 ‘영감’이라는 단어를 다시 삶 속으로 소환해야 할 때다. 시조 창작, 즉흥시 낭송, 국악기의 감정적 연주 등도 이 시도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K-Classic이 이러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음악 실험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향한 한국의 독자적 언어로서 각인될 수 있다.
AI가 넘볼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순간, 바로 영감의 즉흥성을 예술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 이것이 ‘비르투오조 영감 콘서트’가 던지는 화두이며, 우리 시대의 예술이 마주한 근원적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