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오페라 ‘운수 좋은 날’ 탁계석 대본

  • 등록 2025.05.10 10: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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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암울함에 민초들의 밑바닥 생활상을 그려내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1막 1장 : 비 오는 아침의 실랑이

 

여기서는 1막 1장 오프닝의 감정선과 인물 간 갈등, 현실적 압박과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을 오페라적 형식으로 재정리하고, 레치타티보 – 아리아 – 이중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여 음악적·극적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토속적 언어와 미니멀리즘 리듬이 강조되며, 이 장면 전체가 ‘설렁탕’이라는 키워드로 중독성과 비극성을 동시에 품게 됩니다.

 

등장인물
김첨지: 인력거꾼. 현실에 지친 가장.
아내: 병색이 짙은 몸으로 설렁탕을 갈망함.
무대 : 낡은 반지하방.
장대비 소리.
벽에는 물자국. 작은 장독대 옆에 수건과 물동이.

 

[레치타티보 – 아내의 간청]

 

아내 (앉은 채로):
오늘은 가지 마세요…
제발 오늘만은 나가지 마세요…
비가 와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그냥, 여기 있어줘요…
이 작은 방에, 나랑 함께 있어줘요

 

김첨지 (모자를 눌러 쓰며):
안 나가면, 누가 밥 먹여 준대
누가 양식 사다 준대
우라질 년, 오늘도 죽만 바라보게?
설렁탕은 어디서 떨어져!

 

[김첨지– 짧은 아리아 (깐쪼네타)]
(느린 왈츠풍 혹은 굿거리 리듬, 하모니카 간주 가능)
(정선 아리랑 차용?)

 

김첨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이놈의 하루살이 인생
인력거 잡고 죽어라 뛰어야
입에 풀칠 한다니까
죽도록 발품을 팔아야
내가 산다, 겨우 내가 산다!

 

[아내–레치타티보 후 이어지는 칸타빌레 아리아]

 

아내 (갈라진 목소리로):
설렁탕이… 먹고 싶어요…
오늘 하루만… 설렁탕 한 그릇이면…

 

[칸타빌레 아리아 – 아버지와 설렁탕]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며, 민요풍 라르고)

 

아내: 옛날에, 내가 어렸을 적에
읍내 장터, 가마솥
김 모락모락 나는 설렁탕 국물

 

후루루 후루룩
게 눈 감추듯 넘기던 그 맛
아버지가, 웃으며
“한 그릇 더 먹을래?”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맴도네

 

맛있던 그 한 그릇
설렁탕…
그거 한 그릇이면…
정말 소원이 없겠어요…

 

[이중창– 실랑이와 집착이 겹쳐지는 절정 장면]
(빠르게 고조되는 템포, 토속적 타악기와 리듬 강조)

 

김첨지: 누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나
비 오는 날, 우라질 인생
설렁탕… 설렁탕 타령 그만 좀 해!

 

아내: 설렁탕! 설렁탕! 따뜻한 국물
그거 하나면 오늘 견딜 수 있어요!

 

김첨지 (폭발하며):
설렁탕! 설렁탕!
탕탕탕탕!
후루룩 후루룩 설렁탕!

 

아내 (반복 후 점점 쇠약하게):
설렁탕… 설렁탕…
후루룩… 탕… 탕… 탕…
(아내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김첨지는 얼떨결에 문을 꽝 닫고 나가며 장면 암전)

 

이 장면은 ‘설렁탕’이라는 소소한 소망이 어떻게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이끄는지를 보여주며, 1막 전체를 사회적 리얼리즘과 감정의 극적 대조로 마무리하는 결정적 장면이다.


1막 3장: 술과 불안, 설렁탕

 

등장 인물
김첨지 / 치삼이/ 아내
술집 사람들 (주객 1, 2, 3 등) 주모
무대: 경성 뒷골목 선술집 안: 사방이 조악하고 어두운 목재벽, 아코디언, 풍금, 촛불
무대 후면에는 아내의 방 실루엣, 조명으로 환영처럼 비쳐짐

 

[장면 도입 – 선술집 내부]
(조명이 켜지고 치삼이와 김첨지가 술상 앞에 앉는다. 주변은 술꾼들로 소란하다. 유행가 멜로디 ‘황성 옛터’, 아코디언, 트럼펫 등 왜색 분위기 섞임)

 

 

[대화 레치타티보 – 김첨지, 치삼이]

 

김첨지: 오늘 잘 만났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 한잔 하세~
오늘은 내가 운수 좋게 돈을 벌었으니,
내가 한턱 낼게!

 

치삼이: 자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아닐세~ 아닐세~
내가 삼세!

 

김첨지 (돈을 꺼내며): 보라구 이 돈!
나를 무시 말게~
돈 걱정 말고, 오늘은 내가 삼세!

 

치삼이: 허허, 무슨 놈의 세상이
죽도록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당가?

 

김첨지: 누가 아니래!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도
꽁보리밥 한 그릇 건지기 어려운 세상이지!

 

치삼이: 일본놈들이 날마다 공출이다 뭐다
털어가니, 우리가 살길이 있겠는가?

 

김첨지 (취기가 올라와): 오늘은 달라! 걱정 없다네!
오늘은 대박!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야!
운! 수! 좋! 은! 날! 하, 하,하,하

 

[술꾼들 합창 – “술이나 마셔”]

 

술꾼 1: 야, 한잔 하니 기분이 좋구나~
술꾼 2: 술 한 잔에 세상이 다 내 세상이야!
술꾼 3 (주모의 허리 감싸며):
여자도 생각나고 말이야~ 허허~

 

술꾼 4: 야야! 내가 노래 하나 부르지!

 

 

김첨지의 귀환, 침묵, 그리고 만가

 

무대 중앙: 흐릿한 전등이 켜진 어두운 반지하방
구석엔 이불이 덮인 아내의 몸
바닥에 비닐로 감싼 설렁탕 봉지가 놓여 있음
소리는 정적, 희미한 바람 소리만 감돌며 시작

 

[김첨지 독백 – 불안한 귀환]

 

(김첨지 무대 위로 들어오며)
마누라야…마누라야…
(조용하다. 조명은 차갑고 청회색. 숨죽이는 음악이 깔림)

 

왜 이리 조용한 거야… 내가 왔는데…
운수 좋은 날이라며! 왜 아무 말도 안 해!

 

[김첨지 깐쪼네타 – ‘운수 좋은 날이잖아’]
(느리고 부드러운 음계, 웃음 섞인 울음. 감정이 뒤섞인 말노래)

 

김첨지: 세상에서 돈 많은 김첨지가 왔네~
오늘은 재수 대박, 돈이 펑펑 들어왔지
설렁탕 한 그릇쯤은, 가볍게 사올 수 있는 날
그래서 왔어, 마누라야~
내가 사왔단 말야… 설렁탕, 설렁탕을…!
(봉지를 들어 보이며)

 

후루룩 설렁탕~
자네 먹고 싶다 노래하던 그 설렁탕!
(웃다가 울고, 울다 웃음. 실성 직전)

 

[김첨지–실성 / 아내에게 다가간다]

 

김첨지: 자, 일어나게나… 자… 일어나라고…
이 설렁탕 먹고 싶다며…
(조심히 덮은 이불을 젖히며 몸을 흔든다)

 

(침묵, 아무 반응 없음)
하하하… 하하하하하…
(울음을 억누르다 실소와 함께 무너진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덮은 아내의 몸에 파묻는다)
(무대 전체 정적 속에 아이의 울음소리 삽입– 멀리서 흐릿하게 들림)

 

[합창–아내의 죽음 (輓歌]

(조선 후기 굿·장례 민요에서 착안한 구조, 레퀴엠과 타령이 오가며 전개)

[느리고 비통한 도입 – 죽음의 선언]

 

합창: 가네, 가네, 떠나가네

황천길로 떠나가네

배가 고파 죽었다네

김첨지네 마누라

배가 고파 죽었다네…

 

[중간– 타령조 빠른 템포로 전환]

 

먹고 싶은 설렁탕

이승에선 못 먹고

먹고 싶은 설렁탕

저승에선 먹을까?

 

구만리 황천길

허기진 배 움켜쥐고

어이 가나, 어이 가나

배고파 눈도 못 감네

 

[오브리가토 – 간주 및 독창 간섭]

(첼로와 대금 혹은 클라리넷이 독립선율로 오르내림)

(김첨지의 흐느낌이 악기 사이에 섞여 짧게 흘러나올 수 있음)

[다시 느리게 – 회한의 메김과 답창]

 

합창 (메김): 말도 마라, 말도 마라

배고픈 설움, 말도 마라

 

합창 (받아치며): 그 설움 누가 알까

남의 뱃속 누가 알까

쓰린 속, 꽉 막힌 하늘

누가 열어 줄까

 

탁계석 회장 기자 musict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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