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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 “우리나라 오페라계의 불멸을 바라며!”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최근에 올해로 14회를 맞는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5월 4일~6월 25일)의 개막을 알리는 공연인 대한민국 오페라단 연합회(회장:신선섭)와 축제추진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다녀왔다. 그날 공연에 출연한 오페라 가수분들의 훌륭한 기량은 익히 잘 알고 있었고, 만족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훌륭한 연주였다. 그런데 색달랐던 점은 평소 공연을 기획하고 항상 무대 뒤에서만 공연을 준비하고 지켜보던 입장에서 오래간만에 무대 뒤가 아닌 객석에서 들어보는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필자에게 더 큰 희열로 찾아왔다. 

 

그런 희열이 찾아온 순간 필자에게 떠오른 음악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가 작곡한 표제음악 (Program Music) 중 하나인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 중 프롬나드(Promenade)이었다.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을 구성하는 10곡은 각 악장 사이에 프롬나드가 붙어 있어 각 악장 간의 유기성을 강조하는 매우 특색있는 곡이다. 여기서 프롬나드(Promenade)는 프랑스 말로 ‘산책’이라는 뜻으로 무소륵스키가 자신의 친구였던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Alexandrovich Hartmann, 1834~1873)이 남긴 유작 작품들 사이를 옮겨가며 감상하는 그 순간의 거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10곡의 사이에 각각 붙어 있으며 장중하고 당당한 악상으로 친구 하르트만의 유작을 접하는 무소륵스키가 친구의 유작 작품 전람회에서 느꼈을 당시의 생생한 감회를 간접적으로나마 우리가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페라 갈라 콘서트에서 곡이 끝날 때마다 오페라 가수분들의 훌륭한 연주에 답하는 청중들의 환호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는 필자에게 무소륵스키의 프롬나드처럼 아리아 사이사이에서 들려오는 청중들의 멋진 연주였다. 어떻게 보면 하르트만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우리 사회에서 오페라의 인기는 소수의 오페라광 팬들의 사랑으로 그나마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응급 환자이기에, 곡 사이에 울려 퍼지는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는 무소륵스키의 프롬나드처럼 친구의 죽음에 관해 슬픔과 애통함을 뛰어넘는 숭고함으로 불멸의 힘을 주듯이 오페라의 불멸을 위해 숨통을 트게 해주는 산소호흡기로 느껴졌다.

 

서양의 역사에서 수천 년 동안 시인들은 운문을 통해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불멸을 부여하며 작가와 작품이 주는 영향력을 칭송해 왔다. 무소륵스키 역시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을 통해 친구 하르트만과 그의 작품에 불멸을 부여하려는 목적이었다.필자 역시 한국 오페라계의 불멸을 바라며, 무소륵스키가 활동하던 1800년대 러시아 사회를 지면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생각을 나눠 보고 싶다.

 

1800년대 러시아 사회는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의 서유럽 국가에 비하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참 뒤떨어져 있어 우리 사회나 우리 오페라계가 지나온 지난 반세기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무척 닮은 모습이다. 특히 하르트만의 유작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무소륵스키,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의 도시는 산업화로 갑자기 들어선 우리나라의 신도시 문화가 향후 나아갈 방향을 잘 말해준다.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른 유럽 국가의 유서 깊은 도시에 비하면 1800년대 당시로서는 고작 100년을 갓 넘긴, 비교적 역사가 매우 짧은 도시에 속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이 도시는 그 어떤 도시와도 견줄 수 없는 가혹한 역사의 풍파 속에서도 러시아의 문화 수도로서의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써내려 온 도시이다. 도시 창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을 지향하며 러시아 내에서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대표되며 새롭게 러시아 제국의 수도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러시아는 문화 국가의 위상을 쌓기 위해 발레, 오페라 등 서유럽의 공연 예술을 받아들이면서 서유럽 문화와 예술이 거세게 밀려 들어온다. 이때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의 분위기를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드 파이지스(Orlando Figes)의 저서 《유러피언: THE EUROPEANS》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180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1843년 11월 3일 저녁 5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렸다. 극장은 《세비야의 이발사》 중 로시나 역으로 러시아에 처음 데뷔하는 위대한 메조소프라노 가수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를 보려고 나온 관객들로 천장이 무너질 정도로 대 만원이었다. 오페라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시작되자 볼쇼이 극장 내부는 흥분과 전율로 웅성거렸다. 

 

 

메조소프라노 가수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조반니 루비니(Giovanni Battista Rubini, 1794~1854)와 그가 이끄는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함께 곧 러시아 공연을 할 것이라는 소식은 벌써 여러 주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살롱의 주된 화젯거리였다. 언론사들의 취재 열기도 아주 뜨거워서 한 신문은, 실제 공연 이틀 전에 그녀의 첫 번째 러시아 공연에 대하여 찬사가 가득한 보도를 내보냄으로써 다른 신문들보다 먼저 출발선을 뛰어나가려는 발 빠른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무대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핵심 무기였고 비상한 음폭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극적인 박력과 정서적 강렬함이 있어서 비극의 아리아든 그녀가 즐겨 부르는 스페인 집시 노래든 뭐든지 적절하게 상황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수 있어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쌉쌀한 오렌지’에 비유했고 1843년 파리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클라라 슈만은 ‘저런 여자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그들은 순간적인 열광을 격렬하게 폭발시키며 반응해 왔고, 그것은 비아르도를 기쁘게 했다. 그녀의 공연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흥분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비아르도는 《세비야의 이발사》로 데뷔한 다음, 로시니의 《오셀로》,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해 오페라 시즌 레퍼토리를 모두 소화해 나가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매일 밤 관객의 환호 덕분에 더 좋아진다고 느꼈다.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는 ‘브라바!’라는 환호를 받았고, 막이 끝날 때마다 열두 번의 커튼콜이 나왔느데, 대부분 비아르도를 부르는 것이었다. 《몽유병 여인》의 마지막 커튼 때는 오로지 그녀만을 부르는 커튼콜이 열다섯 번이나 나왔다. 커튼 바로 옆의 박스석에 앉아 있던 차리나(황후)는 비아르도에게 동백꽃을 던졌는데, 그녀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 제스처는 무대에 꽃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황실의 금지 사항을 위반한 것이었으나, 하나의 신호가 되기도 했다.

 

다음 날 밤부터 관객들은 비아르도가 아리아를 한 곡씩 끝낼 때마다 무대 위로 꽃들을 던졌다. 그녀에게 열광한 팬들은 구할 수 있는 부케는 모두 사들여서 비아르도에게 던질 기회만 노렸다. 덕분에 극장 주변의 꽃 가게들은 엄청난 대목을 만났다. 이런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발레와 오페라를 통해 쌓은 문화적 교양의 저변이 후에 빛을 발휘하며 러시아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는데, 바로 장장 872일에 걸쳐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벌어진 레닌그란드 공방전에서 발휘된다.러시아 혁명 후 구소련 체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이름을 따 레닌그라드로 도시 이름이 바뀐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해 그해 9월부터 독·소간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펼쳐진다. 1944년 1월까지 장장 872일이나 지속된 역사상 최장기 공방전으로 무려 3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소방관 복장을 하고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옥상에 주둔하고 있는 모습 1941

 

이 시기 쇼스타코비치는 초토화된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을 고무하고 추모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교향곡 7번 작곡에 들어간다. 그는 회고록에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란 말을 남긴다. 공방전이 시작되고 1년이 다 되어가던 1942년 8월 9일 저녁, 레닌그라드의 필하모니아 홀에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초연을 듣기 위해 청중이 물 밀듯 모여들었다.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듣기 위해 평소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야 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많은 시민이 독일군의 포격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음악회의 청중이 되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았다. 군복 차림으로 전선에서 곧장 온 군인들도 있었다. 몇몇은 자동화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은 굶주리고 지쳐있었으나 얼굴엔 저마다 야릇한 기대와 흥분이 넘치는 표정들이었다. 

 

1941~1944년 최소 3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공연 준비를 하는 동안, 멀리서는 붉은 군대가 연주회장으로부터 적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3,000여 발의 고성능 포탄을 독일군에게 퍼부었다.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자 공연장 밖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도시의 거리와 운하 너머로까지 울려 퍼졌다. 붉은 군대는 음악이 독일 병사들의 참호와 포진지가 있는 독일군 진영에까지 들릴 수 있도록 스피커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독일군 포격에 연주회는 잠시 멈춰지기도 했지만, 연주회장을 떠나려는 시민은 없어 음악회는 계속되었고 1악장까지 작곡된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에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계속해 듣기를 원했다. 이에 쇼스타코비치는 청중들을 위해 계속해서 1악장을 되풀이했고, 그날 밤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레닌그라드 시민 모두에게 들려진다.

 

그리고 이 음악회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당시 함락 직전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시민들은 다시 한번 일치단결해 전의를 불태우며 나치 독일에 항복하지 않고 힘든 공방전을 이끌어 나가며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역사에 남는다. 결국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마침내 독일군은 후퇴했고,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트로이도 함락되고 로마도 함락되었지만, 우리의 도시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고 외치며 자신들이 이루어 낸 승리를 자랑스러워한다.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길이 30m 분량의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독일의 포위망을 뚫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막을 넘어 서방으로 넘겨져서 연주된다.나치 독일에 맞선 서방 연합국도 교향곡 7번에 열광했다. 1942년 여름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도 연주돼 극찬을 받았으며, 나치 독일의 맹공에 한때 사기가 꺾였던 연합군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이처럼 공연 예술이 선사하는 힘은 극장을 벗어나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곳에서 큰 힘으로 발휘된다.

 

1800년대 오페라에 열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1942년 쇼스타코비치에게 열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1843~1844년 시즌에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데려오는 대가로 루비니에게 8만 루블을 지급했다. 그중 비아르도 혼자서 6만 루블을 받았다. 그것은 예전에 다른 오페라 가수들이 받아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수준의 대가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그런 비용은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져다주는 문화적 품위와 국제적 위상만으로 충분히 보상되었다 생각했다.

 

오페라와 발레 등에 재정을 아끼지 않은 덕에 역사적으로 짧은 기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800년대 파리, 빈, 런던 같은 문화 도시가 오랫동안 쌓아 왔던 문화적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도시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런 문화적 자존감을 바탕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나치 독일에 함락되지 않았다. 아직도 오페라, 발레 등 공연 예술 관람이 사치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되묻고 싶다.

 

우리가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을 아직도 관람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속에 인간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요소가 많기에 그렇다. 서양 공연 예술의 탄생지 고대 그리스가 민주정을 최초로 고안해 낸 배경 중 하나도 당시 음악극 성격의 비극과 희극 공연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다.플라톤은 인간이 최고의 예술에 노출될 때 그의 영혼에 선이 들어온다는 말을 남겼다. 아직은 그래도 오페라를 찾아 아리아 사이사이에서 프롬나드(Promenade)를 연주해 줄 선한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히 생각하며, 반세기 한국의 오페라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되도록 긍정적인 요소만을 생각하고 반추하며 응급 환자가 다시 한번 멋지게 일어날 수 있도록 오페라계가 노력해 주길 바란다. 

 

한국의 오페라계 세부 사정은 물론 힘든 상황이 많지만, 한국의 오페라 가수들은 이제 180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뒤흔들어 놓았던, 비아르도 이상의 가수들로 넘쳐나기에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아리아 사이사이에 환호해줄 프롬나드(Promenade) 연주자들은 더욱 행복해질 일만 기다리시면 된다. 2023년 제14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은 지난 5월 4일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시작으로   5.19(금)~5.21(일)에는 (사)글로리아오페라단의 베르디(G. Verdi)의 《라 트라비아타》, 5.26(금) ~ 5.28(일)에는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으로 도니체티(G. Donizetti)의 《로베르토 데브뢰》, 6.02(금)~6.04(일)에는 서울오페라앙상블이 모차르트(W. A. Mozart)의 《돈 죠반니》, 6.22(목)~6.25(일) (재)국립오페라단이 베르디(G. Verdi)의 《일 트로바토레》를 선보일 예정이다.